알몸으로 보는 전시가 있다?…도심 속 사우나에 핀 뜻밖의 예술 [정소람의 핫플 스캐너]

입력 2026-08-27 16:51
수정 2026-09-01 12:54

미술관 작품을 옷을 벗은 채 관람하는 전시가 있다. 도시의 소음과 타인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완전한 고립 속, 휴대폰마저 내려놓은 채 오롯이 알몸으로 작품을 마주하는 곳. 국내외 미술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키아프&프리즈(Kiaf & FRIEZE) 주간을 맞아 도심 속 1인 프라이빗 웰니스 공간 ‘시수하우스’에서 개막한 고사리 작가의 기획 개인전 <온기> 이야기다.

국내 최초로 프라이빗 사우나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이경민 시수하우스 대표의 제안에서 시작했다. 이 대표는 "왜 모든 전시는 네모난 하얀 전시장(화이트큐브)에서만 이뤄질까라는 의문이 있었다"며 "사우나에서 혼자 알몸으로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이 관람객들에게도 새롭게 다가갈 것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주인공은 고사리 작가다. 올해 5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기획전 <소멸의 시학-삭는 미술에 대하여>에도 참여했던 그는,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견고한 미술 대신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소멸하는 재료로 '삭는 미술'을 추구해 왔다. 버려지거나 방치된 사물과 공간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오던 작가의 시선이 이번에는 사우나라는 특별한 공간과 만났다.


90분간 오롯이 홀로 이용하는 프라이빗 사우나 공간에 들어서면,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설치작품 대신 공간 곳곳에 나지막이 스며든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우나 욕조 위에 눈사람처럼 세워진 작품 <초사람>이다. 작가가 직접 제초된 잡초와 흙을 손으로 이겨 만든 작품은, 사우나를 즐기는 관객 곁에서 수증기와 열기를 맞으며 전시 기간 동안 조금씩 삭아 사라지도록 설계됐다.

외기욕을 즐기며 땀을 식히는 창가에는 창문 유리 자체를 캔버스로 삼은 <제비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작가가 오랫동안 관찰해 온 제비들의 이동 경로를 종이로 하나하나 덧대어 그린 작품이다. 맞은편 거울에는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새 둥지 작품도 차분히 자리를 잡고 있다. 욕조 주변으로 고사리 작가의 도록이 비치돼, 배스 타임을 즐기며 조용히 작품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다.

건식 사우나로 들어서면 평소 식탁에서 접할 법한 말린 식재료로 만든 모빌 형태의 작품 <땅의 별>이 눈에 들어온다. 귤, 사과, 양파, 버섯 등을 말려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뜨린 이 작품은, 사우나 내부에 감도는 은은한 열기와 증기의 파동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뜨거운 돌 위에 물을 부어 열기를 더하는 '뢰일리'를 즐기는 동안 작품은 하나의 배경이 된다. 이준엽 갤러리신라 디렉터는 "일상에서 접하는 재료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재료 모두가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우나에서 자연스럽게 바스라지는대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미술관에서 눈치를 보며 어렵게 관람해야 했던 여느 전시와 달리, 알몸으로 90분간 한 공간에 머물며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은 매우 신선하고 입체적이다. 옷과 휴대폰 등 문명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내 몸의 감각과 작품의 온기에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깊은 비워냄과 사유가 가능해진다.


사우나의 열기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소멸해가는 자연 재료들을 바라보다 보면 인간 역시 만물의 순환 속에 언젠가 소멸하는 자연의 일부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이번 전시는 9월 7일까지 시수하우스에서 진행된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