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이 커지면서 '완전한 비핵화' 대신 핵동결·군비통제 등 중간 조치부터 논의하는 단계적 해법이 주목받고 있다. 다만 북한이 핵무력 증강을 국가 노선으로 못 박은 데다 동결의 대가로 미국이 내놓을 제재 완화와의 간극도 커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실질적인 핵 합의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7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2026 국제한반도포럼' 개회사에서 "과거와 같은 '완전한 비핵화'를 앞세우는 접근은 더는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1992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플루토늄 90g을 추출했다고 신고한 이후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를 57개로 언급하기까지 북한의 핵능력이 30여년간 크게 확대됐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유지하더라도 북한의 핵능력이 더 커지는 것을 일단 멈추는 조치부터 추진해야 한다는 게 정 장관의 문제의식이다. 북한의 추가 핵물질 생산이나 핵탄두·미사일 증강을 먼저 제한한 뒤 단계적으로 비핵화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정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대화 추진을 "위기가 아닌 기회의 창"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이 북미 대화를 성사시키고 이를 남·북·미·중 4자 대화로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북한이 이 같은 '선(先)동결'에 응할 의사가 있느냐다. 미국 전쟁연구소(ISW)는 26일(현지시간) 공개한 '한반도 업데이트' 보고서에서 "북한은 핵동결과 군비통제를 토대로 한 미국과의 협상에 동의할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이어 미국이 기존 비핵화 정책을 수정하면 북한과의 대화 기회가 생길 수는 있지만 "북한이 핵동결이나 군비통제에 동의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ISW가 주목한 것은 북한이 단순히 비핵화를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핵무력의 지속적인 증강 자체를 국가 노선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지난 2월 미국이 북한의 '헌법상 지위'를 존중하고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헌법은 자국을 핵보유국으로 규정하면서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핵무기나 핵물질 생산을 현재 수준에서 멈추는 것조차 북한이 내세운 핵무력 강화 노선과 충돌할 수 있다는 게 ISW의 분석이다.
설령 북한이 협상에 나서더라도 미국에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의 마지막 핵실험은 2017년 9월이었고 ICBM 시험발사도 2024년 10월 ‘화성-19’ 이후 뜸한 상태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당분간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거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겠다'는 정도일 가능성이 크다"며 "이 경우엔 미국이 제재를 크게 풀어주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중단에 그친다면 북한으로서는 이미 상당 기간 하지 않은 행동을 약속하는 셈이다. 반대로 핵물질 생산 중단이나 핵시설 신고·검증까지 포함하면 북한이 감수해야 할 부담이 급격히 커진다. 미국 역시 북한의 기존 핵능력은 그대로 둔 채 시험 중단만 받아내고 제재를 대폭 완화할 경우 '나쁜 거래'라는 국내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상회담이 열리더라도 구체적인 핵 합의보다 '다음 약속'을 잡는 이벤트에 그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직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트럼프에게 가장 좋은 건 이번에 모든 걸 합의하는 게 아니라 '다음 약속'을 잡는 것"이라며 "10월 중 정상회담을 하고 과거 싱가포르 합의처럼 평화에 관한 원칙적 합의를 발표한 뒤 구체적인 조치는 2차 정상회담으로 넘기는 식"이라고 말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 성과는 부각하면서도 북한에 큰 양보를 하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은 피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