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탕 들어가는 느낌"…'月 2000만원' 대박 난 엄마의 기술 [고수의숨]

입력 2026-08-28 07:00
수정 2026-08-28 10:10
한 도배 전문 인테리어 사무실에 있던 벽지가 든 상자를 들어봤다. 두 팔로 힘껏 들었지만 바닥에서 1~2㎝ 겨우 떨어질 뿐이었다. '도배 고수' 장보영 다올민 대표는 "키가 작고 말랐어서 처음엔 저도 상자를 들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젠 벽지 상자를 거뜬하게 짊어지고 현장을 향한다. 장 대표의 17년 경력은 삶을 다시 일으키는 발판이 됐다. 첫차 타고 막차 퇴근…첫 달 수입 '50만원' 장 대표가 도배를 배운 이유는 생계였다. 과거 남편이 크게 다쳐 장애등급을 받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반지하 월세방을 옮겨 다니는 사이 아이들은 아토피와 잦은 감기에 시달렸다. 새 옷 한 벌을 마음 편히 사주기도 어려웠다. 건설현장 일이라도 하려 했지만 작은 체구에 기술도 없는 여성을 받아주는 곳은 드물었다.

장 대표는 당시 정부에서 시행하는 경력단절여성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그는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다올민 사무실에서 진행된 한경닷컴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엄마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했던 때"라고 떠올렸다.


도배 기술을 배웠다고 곧바로 기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도배 현장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다. 일을 받으려면 방산시장 벽지 매장이나 현장 반장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실력보다 관계가 일감을 좌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장 대표는 현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를 "마치 '남탕에 가는 것처럼' 가면 안 되는 곳에 간 것 같은 느낌이 컸다"고 했다. 그는 현장에서 담배 심부름도 맡았다. 첫차로 출근해 막차로 돌아오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첫 달 수입은 단 50만원. 초보 시절 일당은 약 3만원이었는데 혼자 숙련공으로 일하려면 통상 3년가량 버텨야 했다. 업계에선 3년 차 일당이 15만~17만원, 숙련공이 28만~30만원 수준으로 책정돼 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하지만 맡은 현장을 끝내지 못하면 더 오래 일할 수밖에 없다.

"고객은 벽지를, 전문가는 벽을 봐야" 도배는 벽지를 붙이는 단순 작업이 아니다. 기존에 있던 벽지를 뜯은 뒤 벽면을 고르게 만드는 밑작업을 거친다. 벽지를 재단하고 풀을 바른 다음 풀이 종이에 스며들도록 두는 '노바시' 과정도 필요하다. 벽지를 붙인 이후 현장에 맞춰 잘라 마무리하는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도배가 끝난다.

도배 결과를 좌우하는 기준은 벽 상태를 읽어내는 판단력에서 나온다. 습기나 결로가 있는지, 훼손된 부분은 어떻게 메울지, 바탕 작업을 어디까지 할지 결정해야 한다. 같은 벽지를 써도 판단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 장 대표는 "고객은 벽지를 보지만 전문가는 벽을 본다"고 강조했다. 유튜브 영상만 보고 기존 벽지 위에 새 벽지를 덧붙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혼자서 하루 한 곳을 맡아 일하던 기술자는 이제 20여명의 팀장·팀원과 일하는 대표가 됐다. 장 대표가 이끄는 다올민은 월 150건에 이르는 도배를 수행한다. 한 기숙사 건물 전체를 도배하는 작업을 열흘 만에 끝내는 전문가이자 인력과 현장을 책임지는 경영자로 거듭난 것.


사업은 순항 중이다. 도배 수요는 보통 봄·가을 이사철과 부동산 거래가 활발할 때 늘어나는데 코로나19 당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거 공간에 투자하려는 고객이 많아져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도배사들의 얼굴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장 대표가 입문할 때만 해도 50~60대 숙련공 중심이다 40~50대로 점차 낮아졌다. 최근엔 30대 도배사들이 현장을 누빈다. 다올민엔 외국어 시험 만점에 경쟁률 높은 회사를 다녔던 직장인도 합류해 현재 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팀장은 일한 만큼 가져갈 수 있는 데다 실력에 따라 성장 한계가 정해지지 않는 도배의 매력에 이끌려 벽지를 들었다.

하지만 '도배=고소득'으로 보고 뛰어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 장 대표의 말이다. 처음엔 체력이 달리고 현장마다 조건이 달라 수입도 일정하지 않다. 장 대표는 적어도 1년은 버티고 3~5년은 기술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20명이 도배에 뛰어들면 한 명만 남을 만큼 고된 시간을 버텨야 한다.

소개보다 '리뷰'…플랫폼 통해 매출 '쑥'장 대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발판은 숨고다. 숨고는 장 대표에게 고객과 만날 통로를 제공했다. 성별이나 나이로 일감이 주어지던 업계에 실력과 후기로 평가받을 무대가 생긴 것이다. 작업 한 건을 잘 마치면 '칭찬리뷰'가 달렸고 이를 본 다른 고객이 장 대표를 찾았다. 현재 다올민 매출 중 90%는 숨고를 통해 발생한다.

장 대표는 "숨고는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다만 플랫폼은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줄 뿐이다. 장 대표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은 기술과 신뢰에서 나왔다. 장 대표는 불필요한 공사를 권하지 않고 추가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알리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AI가 산업 곳곳에 확산하고 있지만 똑같은 벽이 하나도 없는 도배 현장에선 사람의 눈과 손, 경험이 필수다. 장 대표는 자신이 받은 기술을 돌려주기 위해 도배사를 양성하는 회사를 꿈꾸고 있다. 그는 "돌이켜보면 저도 누군가가 만들어준 작은 기회 하나에서 시작했다"며 "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그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고수의 숨결이 필요한 현장이 있다. AI가 일터를 뿌리부터 바꾸고 있지만 사람의 몫으로 남아있는 현장의 문제들은 그대로다. '고수의 숨'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상 속 문제가 전문가의 숨결을 거쳐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들여다본다. 장인부터 경력 전환자, 이색 직업 개척자, 지역 기반 전문가까지 다양한 고수의 이야기를 통해 AI 시대에도 대체되기 어려운 사람의 경쟁력과 전문성의 가치를 짚는다. <편집자주>
김대영/홍민성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