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넘게 단일 도매업체 중심으로 운영돼 온 소주 원료 주정 시장에 가격 경쟁 체제가 도입된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음료 등 주류회사가 주정 제조사를 골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물량이 5배 늘어난다. 다만 전체 물량의 90%는 여전히 기존 유통망을 거쳐야 해 소주 소비자가격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5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국세청과 협의해 주정 제조사와 주류 제조사 간 직거래 허용 물량을 내년부터 전체 주정 판매량의 2%에서 10%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전체 판매량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직거래 가능 물량은 약 15만 드럼으로 늘어난다. 현재 직거래 물량은 연간 3만 드럼(1드럼은 200L)에 불과하다. 소주의 맛과 원가를 좌우하는 핵심 원료지만 국내 주정 거래에서는 제조사와 수요업체가 직접 가격을 협상하기 어려웠는데 협상 여지를 넓혀주는 조치다.
주정은 전분이나 당분이 든 원료를 발효·증류한 고순도 알코올이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에 물과 감미료 등을 섞어 만든다. 국내에서는 창해에탄올과 진로발효, 풍국주정, MH에탄올 등 9개 업체가 주정을 생산한다. 이들 기업이 만든 주정은 대부분 대한주정판매가 일괄 구매한 뒤 주류회사에 다시 공급한다. 1972년 설립된 대한주정판매는 국내 주류용 주정의 구입과 판매, 운송을 사실상 전담해 왔다. 과거 영세 주정공장이 난립하면서 탈세, 과당경쟁, 유통질서 문란이 문제가 되자 정부가 주정 판매 창구를 사실상 하나로 묶었다.
이 과정에서 주류회사에 공급되는 주정은 제조사와 관계없이 사실상 한 가격으로 거래됐다. 주정 제조사별 생산 물량도 기존 점유율 등을 토대로 배정돼 업체들이 더 낮은 가격이나 높은 품질을 앞세워 물량을 늘릴 유인이 크지 않았다.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과 같은 구체적인 사례는 없었지만 시장 구조 자체가 경쟁이 극히 제한된 구조”라고 설명했다.
직거래 확대는 이 같은 물량 배분 구조에 처음으로 유의미한 경쟁을 끌어들이는 조치로 평가된다. 2024년 기준 국내 주정시장 점유율은 창해에탄올이 19.8%로 가장 높았고 진로발효가 16.4%로 뒤를 이었다. 풍국주정과 MH에탄올은 각각 9.7%, 9.5%를 차지했다. 상위 4개사의 합산 점유율이 55%를 넘는다.
내년부터는 이들 업체가 직거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가격과 공급 조건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원재료 조달 능력이나 생산수율이 높은 업체는 기존 배정 물량보다 많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 주류회사 역시 주정 품질과 가격, 운송 거리 등을 비교해 공급업체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음료 등 소주업체에는 원가 절감 수단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하이트진로의 올 2분기 소주 부문 매출은 382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1%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582억원으로 18.4% 증가했다. 롯데칠성음료 주류 부문도 같은 기간 매출 1951억원, 영업이익 75억원으로 각각 3.2%, 156.6% 늘었다. 판매량을 크게 늘리기 어려운 내수시장에서는 원재료와 마케팅 비용을 낮추는 수익성 경쟁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다만 이번 조치가 당장 소주 출고가 인하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업계 평가다. 직거래 물량을 다섯 배 늘려도 전체 주정의 90%는 기존 도매망을 통해 단일가격으로 공급된다. 직거래에서 발생하는 가격 인하 폭과 제조사별 물량 배정 방식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대다수 물량이 기존 유통망을 거쳐야 해 소주 소비자가격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는 얘기다. 주정 외에 병과 뚜껑, 물류비, 주세 등 소주 가격을 구성하는 다른 비용도 적지 않다.
정부도 이번 조치를 주정 유통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단계라기보다 경쟁 도입을 위한 시험대로 보고 있다. 직거래 비중을 10%로 확대해 주정 제조사의 가격·품질 경쟁과 주류회사의 구매 행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핀 뒤 추가 개방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공정위는 시장 경쟁 상황과 양곡 수급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 직거래 물량을 단계적으로 더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