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제품 하나 개발하는 데 많게는 억대 돈이 들어갑니다. 제 피와 땀이 들어간 제품으로 중국이나 유럽 시장의 베타테스터가 되라는 겁니까. 지금 중국이 한국 제품을 베끼면서 치고 올라오고 있는데 결국 중국 좋은 일만 될 수 있습니다.”</i>
최근 유럽 바이어와 거래를 논의 중인 한 중소 화장품업체 대표 A씨는 K뷰티 호황에도 웃을 수 없다. 해외 바이어들은 제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계약 체결은 미루고 있다. 특히 포장지에 적힌 제조업체 이름과 주소가 문제다. 브랜드사 입장에서는 해외 바이어를 제조업체로 바로 안내하는 사실상의 '공장 직행 안내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자개발생산(ODM)·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이 보편화된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는 제조사만 알면 유사 제품 생산을 타진하기가 비교적 쉽다.
과거 중국 등을 중심으로 K뷰티 모조품 문제가 끊이지 않았던 데 이어 이제는 국내외에서 한국 화장품 관련 지식재산권 분쟁이 급증하고 있다. K뷰티 성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소 브랜드를 압박하고 있는 규제는 여전하지만, 어렵게 구축한 제조망과 사업 정보를 보호할 장치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소비자의 알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기업의 영업정보와 제조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 다시 늘어나는 화장품 특허분쟁26일 지식재산처가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부산 금정)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화장품 분야 특허 심판 청구는 총 330건이었다. 이 가운데 내국인 청구가 234건, 외국인 청구가 96건이었다.
연도별로 보면 최근 5년간 흐름이 심상치 않다. 2021년 26건→2022년 23건→2023년 25건→2024년 20건으로 줄어드는 흐름을 보였지만, 2025년에는 34건으로 급증한 것이다. 1년 새 증가율은 70%다. 그중 내국인 청구는 2024년 14건에서 2025년 29건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 K뷰티 경쟁에 기업 간 '특허 전쟁'도 격화한 결과로 풀이된다.
외국인 청구자의 국적은 프랑스·미국·독일·일본 등이 중심이었다. 10년간 외국인 청구 96건 중에서는 프랑스 청구자가 가장 많았다. 프랑스가 세계 최대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그룹을 보유한 대표적인 뷰티 강국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레알그룹은 2021년 기준 등록 특허만 497건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 스킨케어·향장 분야의 원천기술을 다수 확보한 프랑스 기업이 많은 만큼 국내 업체와 특허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크다는 해석이다.
해당 통계에서 중국은 빠져 있지만, 위조품 등 분쟁 소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별도로 집계된 상표 무단선점 피해는 중국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지난 10년간 화장품 분야 무단선점 의심 상표 피해는 중국이 2735건으로 가장 많았고, 인도네시아 1498건, 베트남 917건, 태국 838건, 싱가포르 214건 순이었다.
실제 특허청과 코트라 등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국내 화장품 제조기업의 위조상품이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대량 유통되다 2020년 현지 공안 단속에 적발된 사례도 있다. 당시 마스크팩 43만개, 약 10억원 상당의 위조상품이 적발돼 폐기됐다. 중국 업체가 한국 기업의 상표권을 침해했다가 현지 법원에서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 잘 팔릴수록 드러나는 공장주소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업계에서는 제조원 공개 의무를 둘러싼 이의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현행 화장품법은 제품 포장에 화장품책임판매업자뿐 아니라 화장품제조업자의 상호와 주소도 기재·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소비자 알 권리와 제품 추적관리를 위한 장치다.
하지만 중소 브랜드사들 사이에선 이 규정이 영업 현장에서는 제조망과 거래정보를 노출하는 규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반발이 빗발친다. 화장품은 브랜드사가 제품 콘셉트와 성분, 용기, 디자인을 기획하고 제조업체가 생산하는 ODM·OEM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 구조는 K뷰티의 빠른 제품 출시와 시장 성장을 가능하게 한 장점으로도 꼽힌다.
다만 제품 콘셉트와 디자인, 성분 기획, 해외 전시회 참가, 바이어 발굴은 브랜드사가 맡지만 제품이 잘 팔리면 바이어가 포장지에 적힌 제조업체로 직접 연락할 수 있는 구조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또 다른 중소 화장품업체 대표 B씨는 "제조공장이 해외 전시회나 바이어 상담에 직접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중소 브랜드들이 바이어를 만나고 샘플을 돌리며 사실상 제조업체의 영업사원 역할을 해온 측면이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향이나 성분을 조금 바꾸면 똑같은 제품이라고 항의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중국 시장을 경계하는 목소리까지 커지고 있다. 지난 몇년 간 중국 업체들이 한국 화장품을 자국 플랫폼에서 팔아오고 있는데, 어떤 제품이 반응을 얻는지 소비자 데이터를 축적한 후 제조업체에 직접 연락해 라벨과 콘셉트만 바꾼 유사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추후에는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자국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린 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앞세워 시장 장악에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소비자 알 권리와 영업비밀 사이2025년 중소기업 화장품 수출액은 83억20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전체 K뷰티 수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56.2%에서 2025년 72.8%까지 높아졌다. 같은 해 국내 화장품 전체 수출액도 114억달러로 전년보다 11.8% 증가했다. 2023년 특허청 자료상 해외 상표 무단선점 피해 빈발 업종 중에서도 화장품이 약 19%로 가장 많은데, 중소기업 피해가 약 80%로 가장 극심하다.
중소업계는 제조원 정보를 모두 숨기자는 게 아니라 표시 방식을 조정하자는 입장이다. 유럽 등 주요 시장 경쟁자들은 실제 자율에 맡기는 곳이 많다. 미국은 자율에 맡기고 있고, 프랑스 등 유럽은 책임 주체 표시 중심이다. 실제 과거에도 유사한 논란이 있었을 당시 절충안으로 제조원 표기 자율화가 절충안으로 나온 바 있다.
다만 소비자 단체를 비롯해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녹색소비자연대는 "화장품은 피부에 직접 닿고 매일 반복적으로 쓰는 데다 어린 학생들의 사용도 늘고 있어 정보 공개 필요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예로 들며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소비자가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게 포장지에 적힌 제조원 정보"라고 부연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화장품 브랜드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신뢰할 수 있는 제조 회사에서 만든 건지에 대한 정보도 소비자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중론을 보이고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업계의 규제개선 요구와 소비자의 알권리 보장 필요성이 함께 제기돼 다양한 의견이 논의된 바 있지만, 현재까지 제조업자 표시 의무를 변경하기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 규제는 선진국처럼 완화하고 무임승차는 막아야업계 일각에서는 제조업체 정보는 식약처 시스템에 등록하고, 제품에는 책임판매업자와 제조이력 확인 QR코드 또는 등록번호 등을 표시하는 방식 등 대안도 거론된다. 소비자는 안전 정보를 확인하고, 당국은 문제 발생 시 제조공장까지 추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노재일 특허그룹 디딤 대표변리사도 "같은 원료를 쓰더라도 배합 비율에 따라 제품 특성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부분은 기업의 연구 성과로 볼 수 있고, 권리화할 수 있다"며 "K뷰티가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성장하려면 실제 제조·연구 역량이 있고 품질에 책임질 수 있는 업체가 살아남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장 자율성은 높이되, 타사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기업에 대한 제재는 강화해야 한다는 국회 움직임도 있다.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은 앞서 천연·유기농화장품에 대한 정부 주도 인증제도를 폐지하고 민간 자율 인증제도로 전환하는 화장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해 통과를 이끌었다. 국제적으로 화장품 인증 제도가 민간 자율 중심으로 운영되는 만큼 국내 제도도 시장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취지였다.
백 의원은 지난 4월에는 상표권·특허권·디자인권 등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명된 화장품의 판매·보관·진열을 금지하는 내용의 화장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돼 심사 중이다.
백 의원은 "최근 해외에서 우리나라 화장품을 모방하거나 위조하는 등 지식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나라 화장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거나 국내로 반입되어 소비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법적 근거를 비롯한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신현보/김희선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