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릴 때까지 회사 조금씩 부숩니다."
한 직장인이 계단을 오르다 회사 벽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린다. 벽은 멀쩡하다. 다음 날에는 딱밤을 날린다. 또 다음 날에는 허공에 에네르기파를 날린다. '회사 몰래 건물 조금씩 부수기 n일차'라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콘텐츠다. 프로젝트 29일째도 회사는 건재했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회사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엉뚱하고 무해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SNS에서 확산하고 있다. 고용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퇴사·이직 대신 '잔류'를 선택하는 흐름이 강해지자 회사 안에서 스트레스를 풀며 버티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SNS 밈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직장인들은 윈도우 업데이트 창을 띄워 '회사에서 티 안 나게 쉬는 법'을 공유하고 화장실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는 '화캉스'에 빠져들고 있다. 화가 나도 회사를 실제로 떠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 웃음으로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다. 직장인 정신건강 '취약'…탈출구 찾는다
25일 글로벌 디지털 헬스 기업 텔러스헬스의 '2026 텔러스 정신건강 지수(MHI)'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정신건강 점수는 56.9점으로 취약 구간에 머물렀다. 응답자 중 45.6%는 정신건강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30%는 자신의 정신건강이 업무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소속 조직의 문화가 웰빙을 지원한다고 답한 비율은 32%에 그쳤다. 이 조사는 국내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은 스스로 '작은 탈출구'를 만들었다. 회사 벽을 조금씩 때리거나 가짜 업데이트 화면을 띄우고, 화장실에 숨어 잠시 숨을 돌리는 식이다. 회사를 떠날 수 없다면 직장 안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업무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요령도 가지각색이다. '윈도우 가짜 업데이트'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윈도우 10, 맥 OS X, 크롬 OS 등 화면에 운영체제가 업데이트되는 모습을 띄워놓으면 업무를 하지 않고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업데이트 진행률이 실제처럼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어 잠시 숨을 돌리는 직장인들의 '눈치 보지 않는 휴식법'으로 공유되고 있다.
회사 안에서 물리적으로 자취를 감추는 방법도 있다, '화캉스'는 화장실과 바캉스를 합친 말로, 화장실에서 멍하니 쉬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인들이 휴식을 위해 화장실을 찾는 이유는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화장실 칸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혼자 업무 공간과 잠시 단절되기 좋은 곳이다. 일하는 공간에서 잠시 사라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도피처인 셈이다.
30대 직장인 A씨는 "화장실은 회사에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라며 "진짜 막막해져서 머리가 멍해질 때 3분이라도 쉬려고 간 적 있다"고 말했다.
SNS에 올라온 콘텐츠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회사 조금씩 부수기 1일차' 콘텐츠는 조회수는 이날 기준 684만회를 넘어설 만큼 화제다. '윈도우 가짜 업데이트'를 공유하는 콘텐츠는 조회수 456만회를 넘겼다. 이들 콘텐츠엔 "그나마 이렇게 해서 웃기고 피해 안 줘서 다행이다", "이거 소문내면 안 된다", "합법적으로 10분은 쉴 수 있겠다"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회사 뒷담화도 '소비'…퇴사 대신 '밈' 선택
밈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직장인들은 오프라인에서 '직장 스트레스 해소'를 주제로 한 굿즈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오피스 웹툰 '김퇴사'의 팝업스토어 '퇴사인류 긴급지원센터'엔 평일 오후 협소한 공간인데도 10~20여명이 꾸준히 몰렸다.
퇴사인류 긴급지원센터엔 주말 하루에만 매출 1000만원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방문객들은 "그게 될까요?", "그럼 너가 해!", "제가요?"라는 문구가 적힌 '직장인 필수 회화카드' 굿즈에 관심을 보였다.
현직 교사인 이모씨(26)는 "제가 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대신 해줘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며 "김퇴사 인스타그램을 원래 팔로우하고 있을 만큼 팬이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김채민 씨(26)는 "직장인은 아니지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다"며 "굿즈들이 웃겨서 실소가 나온다"고 했다.
기업들도 직장인의 '웃고 버티기' 문화를 콘텐츠를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GS건설은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가기 싫은 회사 대결’ 콘텐츠를 선보였다. 젓가락을 마치 다리처럼 움직이면서 '식대 안 줌', '믹스커피 이름 적고 마심', '야야 반말하는 상사' 등 직장인들이 싫어하는 상황을 적은 다음 이를 걷어차는 식이다. 회사에서 실제로 이 같은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직장인들이 익숙하게 소비하는 밈으로 풀어내며 사내 복지를 강조했다.
직장인들의 '웃고 버티기' 문화는 '생존 전략 전술'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성민 방송통신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와 예전 세대는 집단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며 "개인과 팀플레이어로서의 정체성이 세대와 직무에 따라 충돌하는 곳이 직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상태까지 머무르고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며 "화캉스 등은 혼자 있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박수빈/김대영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