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톤에 달하는 거대한 명동예술극장 바닥이 천장으로 붕 떠오른다. 지각을 뚫고 시공간의 태엽을 역으로 감으며 '추락하는 방'을 연극 무대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한 층 더, 그리고 또 한 층 더 깊은 지하로 추락하는 이 연극은 ‘역행기’. 다음 달 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무대를 올릴 준비를 마쳤다.
이번 공연은 2024년 15년 만에 부활한 국립극단 창작희곡공모(당시 국립극단 희곡상) 대상 수상작을 사상 처음으로 무대화하는 작업이다. 국립극단 창작극 개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인 셈이다.
200분에 달하는 거대한 서사를 이끄는 동력은 바로 이 끝없는 ‘하강’의 에너지다. 인류 최초의 문자로 기록된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 여신의 명계 하강 서사를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여성 3대의 수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지난 24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신재훈 연출, 김주희 작가,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김희경 영상디자이너는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어떻게 지극히 현실적이며 뜨거운 삶의 이야기로 변모했는지 입을 모았다.
글로만 존재하던 거대한 텍스트를 무대로 옮겨내는 과정 자체가 제작진에겐 커다란 도전이었다. “이걸 어떻게 무대화할 거냐”는 주변의 숱한 질문 속에서, 신재훈 연출은 작가에게 대본 수정 요청을 하는 대신 대상작이 지닌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존중하며 연출적 해석으로 풀어내기로 다짐했다.
비현실적 서사 속에서 대사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람이 직접 날거나 떨어질 수는 없지만 추락하는 기분과 상황을 배우들의 실존하는 몸과 감각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김주희 작가 역시 속도감이나 외형적 스펙터클에만 의존하지 않고 관객의 마음에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연출진의 해석에 깊은 신뢰를 표했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바닥을 치는 깊은 절망이다. 신재훈 연출은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 2막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안나의 자조적인 대사에 주목했다”고 했다.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읊조리는 그 절망의 최저점이 오히려 세상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출발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섣부른 희망이나 기대를 노래하기보다 바닥에서 시작하는 구조야말로 극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지탱하는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희곡을 쓴 김주희 작가 역시 이 하강의 과정을 단순한 리얼리티 구현에 가두지 않았다. 라반(Laban)의 신체 움직임 언어를 대사와 결합해 원초적이고 생경한 감각을 관객의 상상력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여기에 첫 연극 작업에 나선 김희경 영상디자이너의 감각이 더해져, 낯선 대사와 움직임들이 극 안에서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완성도를 갖췄다.
창작진에 가장 화두가 된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지하로의 계속되는 추락을 무대 위에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객석의 위치가 고정된 극장에서 무대가 계속해서 땅속 깊이 들어가는 효과를 내기 위해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는 공간의 역행이라는 역발상을 도입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단위인 ‘방’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 무대 위 3톤 분량의 상부 구조물을 역으로 공중으로 들려 올리며 시공간이 추락하고 회귀하는 메커니즘을 창조해낸 것.
여기에 김희경 영상디자이너는 배우 뒤의 배경으로 전락하기 쉬운 벽면 투사 대신 천장을 향해 빛을 쏘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김희경은 “영상이 모션 그래픽이나 기술 자랑에 그치지 않고 조명 및 음악과 한 몸이 되어 숨을 쉬고 박동하며 배우와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하나의 인격적인 장소로 기능하도록 연출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거대한 신화적 판타지 속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우리 곁의 여성의 역사다. 작품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견뎌낸 할머니 ‘주머니’, 산업화 시절 노동 현장의 불평등을 겪은 어머니 ‘에레시’,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 진열되듯 일해야 했던 ‘핑크’, 그리고 기후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대변하는 ‘돌덩이’와 경쟁사회 속 배제된 인물 ‘인안나’가 등장한다. 김주희 작가는 “하늘과 땅을 모두 가졌음에도 저승의 힘을 얻으려 지하로 내려간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의 용맹함이 오늘날 여성들의 서사와 닮아있다”고 했다.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각 세대의 여성들과 비인간 존재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을 통해, 가장 가까운 이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안타까움을 뜨거운 연대의 힘으로 승화시킨 것. 신재훈 연출은 이를 두고 결국 가족을 기다리던 인안나가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라 정의했다.
연극 ‘역행기’가 끝없는 나락의 바닥에서 건져 올리고자 하는 것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귀환의 동력이다. 세속적인 평가나 자존감의 상처로 스스로를 가두었던 삶이 지하의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 및 앞선 세대와 뜨겁게 연결될 때,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갈 가치와 힘을 발견하게 된다. 거대한 무대 메커니즘과 감각적인 언어로 조율된 이들의 추락과 귀환의 여정은, 관객들에게 낯선 판타지를 넘어 스스로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위로를 건넬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은 9월 3일부터 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