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할게요" 외치던 MZ들…이젠 "버티자" 돌변한 이유 [오피스 생존학(上)]

입력 2026-08-24 19:25
수정 2026-08-24 19:39

'퇴사'가 웃음 코드였던 직장인 콘텐츠가 다시 '버티기'로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상에서 '이직·퇴사' 언급량이 급증하고 'MZ오피스'·'김퇴사'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엔 조직 안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웃음으로 푸는 콘텐츠가 주목받는 중이다. 외환위기 이후 콘텐츠 시장에선 줄곧 고용시장 체감도에 따라 직장생활을 소비하는 방식이 변화해왔다.

오피스웹툰 '김퇴사'를 만드는 지창현 작가는 지난 18일 한경닷컴과 만나 "2024년 퇴사란 키워드가 인기였을 땐 퇴사 관련 밈이 많았는데 최근엔 채용시장이 어려워지면서 퇴사보다는 회사 내에서 꾹 참고 잔류하면서 이겨내는 내용의 밈이 인기"라고 설명했다. 지 작가가 지난 13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연 팝업스토어 '퇴사인류 긴급지원센터'도 퇴사 자체보다 회사 안에서 재미있게 소비할 말과 아이템에 초점을 맞췄다.생존→고용불안→퇴사…시대 따라 달라진 콘텐츠 2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온·오프라인에서 인기 콘텐츠로 소비되는 직장생활상은 고용시장 변화에 따라 꾸준히 변화와 반복을 되풀이해왔다.

외환위기 직후 당시엔 '생존'이 최우선 키워드였다. 당시 한국 실업률은 1998년 7%에 육박했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반칙왕'은 생존이 목표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직장생활을 버텨내야 하는 샐러리맨 서사로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은행원 임대호(송강호 분)가 상사에게 시달리며 억누른 감정을 프로레슬링으로 풀어내는, 일터 밖 숨구멍을 찾는 이야기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2010년대 초·중반엔 '고용불안'이 직장 콘텐츠 중심에 섰다. 2013년 예능 무한도전에서 방영한 '무한상사'편은 정과장(정준하 분)이 회사 실적이 나빠지면서 정리해고되는 모습을 다뤄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에 선정된 바 있다. 드라마 '직장의 신'은 정규직·비정규직, 정리해고, 청년실업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듬해 방영된 드라마 '미생'은 계약직 장그래(임시완 분)가 정규직 전환을 위해 버티는 과정을 그려 호평받았다. 당시 9%에 달했던 청년실업률이 드라마 화제성을 뒷받침한 영향이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선 분위기가 달라졌다. '퇴사+취업준비생'을 합친 '퇴준생'이란 용어가 확산했다. 잡코리아·알바몬이 2018년 직장인 282명을 조사한 결과 46.1%는 '이직할 회사가 정해지면 바로 퇴사하겠다'고 답했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이 고향으로 돌아가 삶을 재정비하는 이야기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했다. 직장인 설문과 '리틀 포레스트를 향한 팬심은 "회사에 남아 인정받는 것만이 성공"이란 서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단 신호였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이직·퇴사를 언급하는 온라인 게시물이 급증했다. KPR 인사이트 트리 분석 결과 '이직·퇴사' 관련 언급량은 2020년 6만4000건에서 2022년 13만2000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실제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받은 임금만큼 일하면서 최소한의 업무만 수행하는 '조용한 사직'도 당시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콘텐츠 무게감만 놓고 보면 한층 노골적이고 가벼워졌다. 2021년 유튜브에서 출발한 '좋좋소'는 중소기업 현실을 코믹한 상황과 세밀한 현실 고증으로 풀어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방영되기도 했다. 특히 여행 크리에이터 '곽튜브'가 과거 직접 겪은 사연을 콘텐츠로 만들어 화제가 됐다. 이날 기준 유튜브에 공개된 좋좋소 콘텐츠 누적 조회수는 약 7700만회에 이른다.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 인기 코너였던 'MZ오피스'에선 주현영·김아영·지예은 등이 연기한 'MZ 사원'이 화제성의 중심에 섰다.

'김퇴사'도 이 흐름에 맞춰 성장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2023년 3월 연재를 시작해 약 1년 7개월 만에 누적 조회수 2000만회를 넘겼다. 첫 단행본 '퇴사인류 보고서'는 "백날 입으로는 때려치운다지만 몸은 착실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퇴사 욕구를 동료끼리 공유하는 농담과 위로로 바꾼 콘텐츠란 평가다."퇴사할게요"에서 "일단 버티자"로…사회변화 '징후'지난해엔 직장 '대잔류' 흐름이 뚜렷해졌다. 잡코리아가 자사에 등록된 이력서의 최종 근무기업 근무종료일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상반기 퇴사자 수는 약 20만명으로, 2024년 하반기(26만명)보다 22% 줄었다. 정규직 채용은 같은 기간 9% 감소했고 경력직 공고 비중은 41.6%에서 44.7%로 확대됐다. 잡코리아는 경기 침체로 이직이 어려워지면서 현 직장에 머무는 '대잔류의 시대'가 됐다고 규정했다.

올해 고용시장은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잡코리아 조사를 보면 올 상반기 전체 채용공고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늘었다. 하지만 지난달 청년 고용률은 44.2%로 1년 전보다 1.6%포인트 떨어졌다. 청년실업률은 1.3%포인트 오른 6.8%를 나타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청년 신규 진입 감소가 상용직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채용공고 총량과 별개로 청년층의 진입 문턱은 높다는 얘기다.

가장 최근엔 '회사 안 생존'을 전면에 내세운 콘텐츠도 흥행하고 있다. 예능 '직장인들' 시즌2는 '리얼 오피스 생존기'를 내세웠는데 공개 첫 주 대비 시청량이 1023% 늘었다. 유튜브 클립 누적 조회수는 지난달 기준 약 5000만회에 달했다.

물론 고용시장 동향이 콘텐츠 유행을 좌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외환위기 직후 '살아남아야 했던 직장인'들은 2010년대 후반 '떠날 준비를 하는 직장인'을 거쳐 코로나19 이후 '퇴사를 밈으로 즐기는 직장인'으로 변했고 최근 들어 다시 '회사 안에서 버티며 웃는 직장인'으로 변모했다.

전문가는 직장인 콘텐츠의 변화 역시 사회 변화의 '징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대중문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학술적으로는 '직무적 독해'라고 표현한다"며 "특정 소재에 대한 공감과 수요가 확인되면 관련 콘텐츠가 늘어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교수는 "대중문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재를 통해 아직 뚜렷한 증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수빈/김대영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