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국기 훼손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 추진에 이어 최근에는 천황에 대한 명예훼손·모욕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따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21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자민당 보수계 의원들로 구성된 ‘일본의 존엄과 국익을 지키는 모임’은 지난달 ‘황족 보호 프로젝트팀(PT)’을 설치했다. 개정 황실전범에 따라 옛 11개 궁가의 남계 남성이 황족의 양자가 될 수 있게 된 만큼 이들과 가족을 온라인상의 비방과 허위정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일본 형법상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다. 천황과 황후 등 일부 황족에 대해서는 총리가 대신 고소할 수 있도록 한 예외 규정이 있지만 실제 적용된 사례는 없다. 황족이 일반 국민을 직접 고소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제도가 사실상 기능하지 않는다는 게 보수 진영의 주장이다.
일본보수당은 한발 더 나아가 황족에 대한 명예훼손과 모욕을 친고죄 대상에서 제외하는 형법 개정을 중점 정책으로 제시했다.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수사기관이 처벌에 나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보수계 시민단체인 ‘황실의 존엄을 지키는 국민운동’도 SNS상의 황실 관련 허위정보와 비방을 문제 삼으며 관련 법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최근 보수 정치권이 추진하는 국기 보호 입법과도 맞닿아 있다. 일장기를 고의로 훼손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하는 이른바 ‘국기 훼손죄’ 역시 국가의 상징을 일반적인 표현 행위보다 강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한다. 보호 대상만 국기와 황실로 다를 뿐 국가적 상징에 대한 모욕이나 훼손을 형사처벌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국가가 특정 상징에 대한 존중을 법으로 강제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황실 보호를 명분으로 명예훼손·모욕죄를 비친고죄로 전환할 경우 비판과 풍자까지 수사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제국 시절 천황과 황실에 대한 ‘불경한 행위’를 처벌하는 불경죄가 존재했다. 그러나 처벌 기준이 모호해 사상 통제와 언론 탄압에 이용됐다는 비판을 받았고, 전후 새 헌법이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하면서 1947년 폐지됐다. 고난대 소노다 히사시 명예교수는 황족 대상 명예훼손을 비친고죄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불경죄의 부활이 아니라고 해도 기능적으로는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보수 정치권은 국기 훼손죄와 황실 보호 입법 모두 기존의 형사법 체계 안에서 추진되는 만큼 전전의 제도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다. 다만 국가와 황실의 권위를 어느 수준까지 법으로 보호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상징 보호’와 ‘표현의 자유’의 충돌은 앞으로 일본 정치권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