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의 인기가 9n년생들의 추억을 건드렸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홍은영 작가판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80만~100만원대 매물로 등장하는 등 '추억 소비'가 나타나고 있다. 영화를 본 90년대생들이 20여 년 전 읽었던 어린이 학습만화를 다시 수집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있다."홍은영판이 진짜였지"…90년대생의 희귀한 '추억템' 된 학습만화
90년대생은 단순히 어린이 학습만화를 다시 찾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읽었던 그 판본'을 찾았다. 22일 한경닷컴이 입수한 번개장터 거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이달 18일까지 그리스로마신화 관련 상품의 30대 구매자 비중은 40%를 넘어섰다. 전체 도서 카테고리에서 20대 구매자 비중이 44.2%, 30대가 19.7%인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용자는 '홍은영' 작가를 찾았다. 번개장터에 등록된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상품의 65%가 상품명이나 설명에 ‘홍은영’을 명시했다. 20권 전집만 따로 보면 쏠림 현상은 더 뚜렷하다. 전집 매물의 83%가 홍은영 판본이었다. 다른 출판사 판본이 10만원 미만에 올라온 사례가 있는 반면 홍은영 판본은 20만원대 이상으로 등록돼 있었다. 상태가 좋은 경우 80~100만원으로 가격이 제시되기도 했다. 같은 책이라도 어떤 작가가 그렸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 번개장터에는 홍은영 작가판을 특정해 찾는 게시글도 올라온다. 한 판매자는 "홍은영 작가의 18권이 없어 새로 구매해 채웠다"며 특정 작화가의 판본으로 전집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90년생들이 특정 작가판에 열광하는 이유는 추억과 '절판본'이라는 희귀성이 있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홍은영 작가판은 2004년 저작권·인세 분쟁으로 작가가 교체되며 절판됐다. 현재 일반 서점이나 공식 전자책으로는 구할 수 없다. 실물책은 번개장터, 당근마켓 같은 중고 플랫폼이나 헌책방, 공공 도서관 대여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중고서점에서도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홍은영판은 찾을 수 없었다. 중고서점에서도 원하는 판본을 구하기 쉽지 않은 셈이다.
2004년 당시 초등·중학생이던 90년생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홍은영판' 애착을 드러내고 있다. 인스타그램 등 릴스에서는 '요즘 최고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책장에 꽂힌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홍은영 작가판을 자랑하는 게시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해당 게시글을 일주일 만에 조회수 99만회를 돌파했다.영화 개봉하자 중고책 등록 334% '급증'…프리미엄 가격대 형성도
홍은영 작가판의 '몸값'이 기존부터 높았던 건 아니다. 번개장터에서는 영화 '오디세이' 개봉 이후 관련 거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영화는 이달 5일 개봉했지만 관련 상품 등록은 개봉 둘째 주부터 첫째 주보다 약 3배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이달 5~18일 상품 등록은 334.1%, 판매완료는 363.2% 증가했다. 반면 지난달 9일 예매가 시작됐을 때나 이달 3~4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내한했을 때는 관련 거래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개봉 전 홍보보다 실제 관람 이후 중고시장으로 수요가 이동한 셈이다.
이러한 어린이 학습 만화 인기 현상은 여름 방학으로 인한 수요 증가로 보기도 어렵다. 같은 기간 번개장터에서 'Why 시리즈' 등록은 55.3%, '흔한남매'는 30.8%, '마법천자문'은 11.8% 증가했다. '살아남기' 시리즈는 오히려 40.3% 감소했다. 이달 5~18일 다른 학습만화 4종의 관련 상품 등록량이 평균 14% 증가하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하면, 같은 기간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상품 등록량은 372.7% 늘어 두드러진 증가세를 보였다.
이번 현상은 절판 상품을 중심으로 한 리커머스 시장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신품으로 같은 판본을 구하기 어려운 만큼, 영화를 본 소비자가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경로가 이미 책을 가지고 있는 개인 판매자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새로운 콘텐츠 소비를 만들었다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과거의 상품이 다시 공급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개봉 3주차에도 영화 흥행이 이어지면서 90년대생의 '추억 소비'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오디세이는 21일 기준 누적 관객은 678만8000여명으로 700만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번개장터 관계자는 "새로운 콘텐츠를 계기로 과거 상품을 다시 찾는 수요가 꾸준히 확인된다"며 "절판된 상품은 개인 보유자가 유일한 공급원이 되기 때문에 리커머스의 역할이 커진다"고 말했다.
팬덤의 '설렘'은 단순 '덕질' 소비를 넘어서 실질적인 경제 지표를 움직이는 '덕질 경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K-컬처를 매개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총망라해 대중의 열광이 어떻게 '설레는 소비'로 치환되는지 그 이면의 수익 구조와 비즈니스 모델을 날카롭게 포착하고자 합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