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티셔츠를 두장 더 산 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신선경의 요가하는 변호사]

입력 2026-08-28 10:39

한동안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홈쇼핑에서 이미 가지고 있던 흰티와 똑같은 것을 두벌이나 더 사고 말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패션을 무척 좋아했(었)다. 국민학교 (나는 교복 이전 세대이다) 때 처음 접한 잡지가 ‘월간 멋’인데, 라이센스가 아닌 국내 동아일보사가 자체 기획한 잡지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의상 트렌드에 중점을 두면서도 연예계 소식과 영화, 음악, 라이프스타일 등 당시 대중문화 전반을 다루었다.

그 때 이미 키가 크고 발도 커서 80년대 한국에는 내게 맞는 아동복이나 신발은 존재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사주시는 것 외에 내가 입고 싶은 옷을 고른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지만, 잡지 속의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저렇게 입고 다니고 싶다 꿈꿨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앤 해서웨이)처럼 패션지에서 일하거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과 그걸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은 별개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공부나 열심히 하면서 철저히 소비자의 길만 걷게 되었다.

“공부나”라고 표현했지만, 공부라는 기술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많은 분들도 공부를 통해 직장에 들어가거나 나처럼 자격증을 따서 생계를 이어가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의 편의를 위해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공부해서 자격증을 얻은 덕택에 그 돈으로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도 다닐 수 있고, 자녀 교육도 시킬 수 있으며, 마침내 내가 입고 싶은 옷도 사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공부는 단순히 기술 습득을 넘어서, 문제 해결을 위한 근육을 키우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인내력을 기르는 과정이었기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것도 분명하다. 아름다운 의복을 만들거나 맛있는 요리를 하는 능력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공부 잘 하는 능력도 나름의 의의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착각사람은 이렇게 각자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물질세계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래 한톨, 심지어 미세먼지 한톨도 우리는 무에서 유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 기존에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모아서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도, 우주의 별먼지와 태고의 암석, 그리고 지구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선사 시대의 유기물이 새롭게 재조합된 결과물일 뿐이다. 앞서 말한 패션 디자이너들은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면화나 동물성 단백질(실크, 울), 또는 석유에서 뽑아낸 합성 섬유를 가져다 자르고 꿰매어 사람의 체형과 시대의 감성에 맞게 새로운 실루엣으로 재조합하고, 요리사도 소금, 물, 아미노산, 탄수화물이라는 자연의 화학 물질에 '열'이나 '발효'라는 에너지를 가해 분자 구조를 변형시키고, 이를 접시 위에서 전혀 새로운 미식의 경험으로 만들어낸다.

지식노동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뇌 속의 생각이 무에서 유의 창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생각은 뇌 신경세포(뉴런) 사이를 오가는 전기신호이자, 도파민, 세로토닌, 글루타메이트 같은 화학적 신경전달물질의 물리적 이동이고, 변호사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 체계와 직관력은 단백질과 미네랄, 전기 에너지가 만들어낸 고도로 정밀한 물리적 건축물이다. 결국 나도 뇌 속에서 이 물질 저 물질 이동시키면서 재조합한 것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렇듯 사람이 무언가를 고유하게 창조하지 못하는 데다, 생존을 위한 수렵채집의 본능이 수천년동안 우리 DNA에 각인되어 있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거나 농산물을 채집하지 않아도 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본능이 쇼핑을 통해 발현되고 있다.

똑같은 흰티를 3장이나 가지게 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참 돌아왔는데, 세상에 흩어져 있는 물질들을 내 몸과 일상 위에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나의 취향을 시각적으로 재조합한 채집행위까지는 좋았다. (그 과정에서 잠시이지만 도파민도 발생한다). 문제는 십 분쯤 뒤에 터졌다. 무심코 튼 유튜브에서 하필이면 삿구루(Sadhguru, 인도 이샤 재단 창립자)가 죽은 사람의 옷과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이 내 결제 내역을 들여다본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도 처리하기 힘들만큼 옷이 많은데,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남은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가지고 있는 옷을 지금부터 정리하기 시작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심지어 똑같은 옷을 더 사다니. 급 후회가 밀려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고 나면 남은 내 물건은 산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입던 옷을 모두 태울 수는 없다. 법률가로서 짚자면, 허가받은 시설이 아닌 곳에서 폐기물을 태우는 것은 폐기물관리법 제8조 제2항이 금지한다. 생활폐기물이니 형사처벌까지는 아니고 100만원 이하 과태료 대상이지만, 마당에서 옷을 태우는 것은 어쨌든 위법이다. 게다가 플라스틱이 섞인 생활쓰레기를 노천에서 태우면 다이옥신, 퓨란, 시안화수소 같은 것들이 나온다. 다행히 내 옷장은 천연섬유 비중이 높지만, 안감 등에 폴리에스터와 나일론도 있으므로 위험하다.

멀쩡한 물건을 그냥 내다 버리는 것 역시 비움이라 부르기 어렵다. 한국환경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한 해 나오는 폐의류·폐섬유류가 약 80만 톤인데 재활용률은 12.6%에 그치고, 2023년 기준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헌 옷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우리가 '기부'라 부르며 수거함에 넣은 옷의 상당 부분은 지구 반대편 어느 매립지로 간다. 집에서 죽을 권리라는 난제이렇게 죽고 나서 내가 모은 각종 물질들의 처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근본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살아있는 우리는 ‘내 일이 아니다’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내가 평생 가장 오랜 시간동안 모은 물질인 이 ‘몸’이 죽을 때, 과연 내가 원하는 곳에서 죽을 수 있을까? 나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가급적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잘지내라고 한마디라도 하고 죽고 싶은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알아보니, 집에서 죽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가망이 없어 집에 가서 죽겠다고 하면, 갈 수 있나?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혼자 써두는 것으로는 효력이 없다. 보건복지부 지정 등록기관을 찾아가 설명을 듣고 작성·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서는 '죽는 방법을 고르는 서류'가 아니다.

담당의사와 전문의가 나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로 판단했을 때, 그 시점의 연명의료에 관한 내 뜻을 확인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 판단과 이행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갖춘 전국 513곳의 의료기관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연명의료 유보·중단 50만여 건 중 환자 본인의 의향서에 근거한 것은 12.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가족의 진술이나 합의로 결정됐다. 그러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고 해서 집에서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 서류에는 임종 장소를 적는 칸이 없다.

"집에서 죽으면 무조건 부검한다"는 이야기도 정확하지 않다. 형사소송법 제222조는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있는 사체"가 있을 때 검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변사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인이 분명하지 않은 죽음을 말한다. 의료법도 의사가 "검안하여 변사한 것으로 의심되는 때"에 신고하도록 규정한다. 기준은 어디서 죽었느냐가 아니라 사인을 확인해 줄 수 있느냐다.

실무의 열쇠는 의외로 조문 한 줄에 있다. 의료법 제17조 제1항 단서는 진료 중이던 환자가 최종 진료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사망한 경우 다시 진찰하지 않고도 진단서를 발급할 수 있게 한다. 곁을 지키던 의사가 있으면 사망진단서가 나오고, 없으면 검안으로 가고, 검안으로도 사인이 불분명하면 변사 신고와 검시로 이어진다. 즉 자택 임종의 관건은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임종기까지 진료 관계를 유지해 줄 의사를 확보하는 일이다.

문제는 그 의사를 구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가정형 호스피스가 그 역할을 하지만 전국에 40곳뿐이고, 2024년 신규 호스피스 이용자 2만4318명 중 가정형은 2245명, 단 9.2%에 그쳤다. 경북, 경남, 전남에는 아예 한 곳도 없다. 대상 질환도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 만성 간경화, 만성 호흡부전 다섯 가지뿐이다. 법이 그 빈자리를 어떻게 보는지는 2022년 대법원 판결이 보여준다. 한 호스피스 기관에서 환자가 사망하자 곁에 있던 간호사들이 사망 징후를 확인하고 의사에게 전화로 보고한 뒤 유족에게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대법원은 이를 무면허 의료행위로 보아 의료법 위반에 대한 간호사들과 의사, 재단법인 모두의 상고를 기각했다. "사망의 진단은 의사 등이 환자의 사망 당시 또는 사후에라도 현장에 입회해서 직접 환자를 대면하여 수행하여야 하는 의료행위이고, 간호사는 의사 등의 개별적 지도·감독이 있더라도 사망의 진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망 징후를 관찰하는 것까지는 간호사의 업무지만, 그것을 사망으로 판정하는 순간부터는 의사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법리로는 맞을 수 있지만, 방문간호사만 곁에 있는 자택 임종의 현실과는 아득히 멀고, 이 판결 덕분에 더더욱 멀어졌다.


그 간극의 결과가 통계로 나온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우리 국민의 74~75%가 의료기관에서 죽었고 집에서 죽은 사람은 15~16%였다. 경찰이 변사로 출동한 사건 중 약 40%, 연평균 1만 5000건 가까이가 결국 자연사로 판명된다. 국회입법조사처와 대한재택의료학회가 임종확인 절차의 법제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집에서 죽고 싶다는 소망은 아직 제도가 받아주지 못하는 소망이다. 서류 한 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입법으로 메워야 할 공백이다. 오늘을 비우는 연습집에서 죽는 일은 제도적 문제여서 내 마음대로 하기 힘들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세상을 떠난 뒤 내가 가진 소유물들이 가족의 시간과 마음을 오래 붙들지 않기를 바란다. 가진 물건도 한꺼번에 버리기보다 시간을 두고 정리할 생각이다. 쓸 수 있지만 내게 필요 없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미리 나누려 한다.


요가에서는 죽음을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매일 자고 깨는 일, 매일 먹고 비우는 일과 같은 결의 과정으로 본다. 매일 아침 몸을 비우지 못하면서 인생이 막힘없이 흘러가기를 바랄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 아무것도 비우지 못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만 홀연히 가벼워질 수는 없다.

결국 잘 죽기 위한 준비는 죽음 직전에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죽고,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오늘 사려던 옷을 결제하기 전에 장바구니에서 빼는 일, 필요 없는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미리 건네는 일, 가족과 불편한 대화를 먼저 꺼내는 일에서 이미 시작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삶을 축소하는 일이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만 남겨 삶의 밀도를 높이는 일이다. 비움은 마지막 순간의 기술이 아니라, 오늘을 더 명료하게 사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