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 20일 05:4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기업의 회계 부정은 흔히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드라마 속 악행을 일삼는 빌런들은 기업의 소속이 아니라 하더라도 막대한 비자금을 만드는 소재가 많고 이러한 비자금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비밀 장부이다.
요즈음 드라마 등의 소품에 대한 현실성의 고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기업 범죄나 비자금이 다루어지는 장면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빨간 테두리의 회계장부이다. 최근에 내가 보고 있는 드라마에서도 거액의 횡령이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횡령을 증명하는 주요 증거로 빨간 테두리 장부가 등장했다. 나는 25년 넘게 회계사로서 기업의 회계 기록을 다루고 있지만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그 종이 장부를 본 기억이 없다.
만약 그 드라마가 1970년대 또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시 기업들은 수기 장부를 활용하여 회계 기록을 작성했고, 이러한 기록 중에는 빨간색 테두리를 한 현금출납장이나 다른 회계 장부들이 실제로 존재했을 것이다. 필자도 중학교 상업 수업에서 회계를 배우던 시간이 떠오른다. 부기 교재의 페이지를 넘기며 분개장, 현금출납장, 계정별 원장 등을 필사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도 기업의 회계담당자였는데, 결산 시즌이 되면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셨다. 어떤 때는 서류 뭉치를 들고 집에 와서 연필과 지우개로 한참을 일하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회사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결산 업무를 집에서 완료하셨던 것 같다.
드라마 속 빨간 테두리 장부는 바로 그런 시대에 존재했던 회계 기록의 저장 매체였다. 그런데 실무적으로 2000년 이후로는 이러한 수기 장부를 사용하는 회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자주 찾는 식당 중에는 계산대 앞에 하루 매상을 기록하는 수기 장부를 관리하는 곳도 있지만, 적어도 드라마에서 나오는 빌런이 관리하는 규모의 현금이라면 수기 장부에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수기 장부를 쓰지 않겠지만, 횡령 등의 부정을 저지르는 빌런들이라면 전산 시스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수기 장부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10년 이상 회계 부정 조사를 해온 필자의 경험으로는 기업의 부정도 대부분 전산 매체에 기록된다. 종이에 기록된 부정은 거의 없다. 현대의 회계 환경에서 수기 장부를 통한 비자금 관리는 오히려 더 의심하기 쉽고 추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사실성을 고려하여 대본을 작성하는 드라마 작가님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 앞으로 제작할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빨간 테두리 장부를 비밀 장부로 등장시키지 않아 주길 바란다. 물론 작가님들이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빨간 테두리의 장부를 어쩔 수 없이 등장시켰을 수도 있다. 실무적으로 비자금 기록이 필요하다면 USB나 클라우드 같은 별도의 저장 공간에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빨간 테두리 장부를 들고 도망치는 장면보다는 USB를 가지고 다니거나 클라우드 접근 권한을 놓고 다투는 모습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이다. 물론 과거 수기 장부의 시각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종이 장부를 소품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선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이책의 절단면에 붉은 염료나 마블링 무늬를 입히는 기술을 제본 용어로 '천두(天頭, Red Edge)'라고 부른다. 이 기술은 19세기 서구의 근대 부기 체계에서 정착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에도 자리 잡았다. 이러한 천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실용성과 '아날로그식 내부통제'의 목적으로 적용된 기술이었다.
장부는 매일 사람의 손을 거쳐 수년간 보존되어야 한다. 손가락의 땀과 유분, 먼지로 인해 종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붉은 안료를 코팅하듯 칠해 두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목적은 '위·변조와 낙장(落張) 방지'였다. 수기 장부 시절 흔했던 부정 수법은 부정을 저지른 특정 페이지를 몰래 뜯어내거나, 위조된 전표가 적힌 종이를 중간에 끼워 넣는 것이었다. 책을 통째로 묶은 뒤 단면을 붉게 염색해 두면, 단 한 장이라도 뜯어내는 순간 단면의 붉은 층 두께가 어색해지고, 새로운 종이를 끼워 넣으면 그 부분만 하얗게 도드라져 육안으로 즉시 위조를 식별할 수 있었다.
결국 드라마 속 빨간 장부는 과거의 회계 종사자들이 종이라는 물리적 한계 속에서 장부의 무결성(Integrity)을 지켜내기 위해 고안했던 기술적 보안 장치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대 기업의 대표적인 회계 기록 시스템인 ERP도 이러한 기술적 보안 기능을 갖추고 있다.
수기 장부가 ERP 등의 디지털 장부로 전환된 이유는 여러 편의성 때문일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편의성은 한 번의 입력으로 그 기록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점이다. 과거 종이 장부의 경우 이기(移記) 과정에서 금액이나 내용이 실수로 잘못 전기되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현대의 회계시스템에서는 이러한 전기 오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 주목할 만한 점은 과거 수기 기록의 위·변조를 막기 위한 천두와 같은 기능이 현대 ERP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이다. 갖춰진 ERP 시스템이라면 회계 기록의 최초 입력 이후 수정, 승인 등의 과정에 대한 로그 기록이 남는다. 회계 기록의 조작이 의심될 때 이러한 로그 기록을 분석함으로써 조작된 내용을 파악하고 조작한 담당자를 특정할 수 있다.
더욱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로그 기록은 단순한 보안 기능을 넘어선다. 디지털 기술은 로그 기록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ERP 상의 각 거래가 입력된 이후 처리되기까지의 시간을 측정하거나, 거래의 처리 경로를 시각화하면서 프로세스의 병목지점을 파악하고 생산성을 측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분석을 통해 부정 가능성이 높은 거래를 선별해낼 수도 있다. 비용을 들여 고가의 ERP를 도입했다면, 거래 처리에만 그치지 말고 이러한 분석의 필요성도 함께 검토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특히 회계 및 자금 거래 기록과 관련된 분야로의 기술 유입 속도도 매우 빠르다. 이 글을 통해 드리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영화나 현대를 배경으로 사실적인 대본을 작성하고자 하는 작가님들의 작품에 더 이상 빨간 테두리가 그려진 장부가 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