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에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 3층, 8m 높이의 정사각형 전시실에는 백색 '묘법' 작품 세 점이 서 있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1931~2023)가 "미술관이 생기면 걸겠다"며 2023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그림이다.
오는 21일 문을 여는 이 미술관은 원래 작은 기념관으로 지어질 계획이었다. 2023년 박서보가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추진하던 공립미술관 건립이 중단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박서보의 차남인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까지 5개 층에 건축면적 2000㎡ 규모로 설계를 키웠다. 박서보가 생활하고 그림을 그리던 집 바로 옆이다. 건물은 전시실 세 곳과 워크숍 공간, 층마다 야외 정원을 갖췄다.
박서보의 작품으로만 전관을 채우는 공간이 아니다. 박 이사장은 "이곳을 박서보의 성전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며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의미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부터가 그렇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서보의 회화 25점을 베트남 출신 프랑스 화가 흐엉 도딘(81)의 회화 17점과 함께 선보인다.
두 사람은 2023년 여름 만났다.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 도딘이 서울을 떠나기 전 박서보를 찾아왔다. 서로의 작업을 모르던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프랑스어로 옮기는 통역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대화 끝에 박서보가 "자연이 내 스승"이라고 말했을 때, 도딘은 통역하려는 아들을 막고 "다 알아들었다"고 했다.
박서보는 그 만남을 인스타그램에 적었다. 그는 "구도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단색화와 맞닿아 있다"며 "평생 비슷한 작업을 해와서일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일까"라고 썼다. 석 달 뒤 그가 세상을 떠났다. 도딘은 부고를 듣고 흰 안료를 겹겹이 쌓은 'X.K.N.31'을 완성해 박서보에게 헌정했다. 도딘은 박서보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였다.
두 사람이 화면을 다루는 방식은 실제로 닮았다. 박서보는 물에 불린 한지에 반복해서 선을 긋고 밀어내 표면에 고랑과 이랑을 만들었다. 도딘은 직접 고안한 얇은 광물 안료를 수십 겹 쌓아 색의 층 사이로 빛이 배어 나오게 했다. 서로 만난 적이 없고 재료도 방식도 다르지만, 둘 다 화면에서 '덜어내는 것'을 추구했다.
전시는 지하 2층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간다. 지하에는 두 작가의 1990년대 작품이 마주 놓인다. 박서보가 안성 작업실의 황토 바닥에서 얻은 황색 계열 그림과, 도딘이 어린 시절 베트남 풍경과 여름마다 찾는 남프랑스 그라스에서 얻은 그림이다. 2층은 박서보의 흑색 한지묘법과 색채 한지묘법으로 채웠다. 아궁이의 그을음에서 가져와 '아궁이색'이라 부른 검은 화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단풍과 옥, 하늘 같은 자연의 색이 화면에 들어왔다.
3층에서 두 사람의 백색이 만난다. 같은 흰색이지만 출처가 다르다. 이유진 박서보재단 이사는 "도딘의 흰색은 여덟 살에 프랑스로 건너간 작가가 처음 본 눈과 그 눈이 녹으며 드러나는 빛에서 왔다"며 "박서보의 흰색은 조선백자의 회백빛과 삼베의 누르스름한 빛, 표백하기 전 자연 그대로의 흰색을 닮았다"고 했다. 반투명 유리를 지난 자연광이 백색 묘법 세 점의 표면을 훑고, 맞은편에서 'X.K.N.31'이 그 광경을 마주한다.
박 이사장은 "연간 세 차례 전시를 열고, 주목받지 못했거나 어느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기 어려웠던 여성 작가를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단이 지금까지 사들인 전업 작가 작품의 90% 이상이 한국 여성 작가의 것이다. 내년에는 미디어아트 듀오 김치앤칩스와 동양화를 전공한 류노아의 개인전이 열린다.
개관 첫날인 21일에는 도딘과 박 이사장이 참여하는 '전시 토크'가 열린다. 전시 기간에는 가수 요조가 글쓰기, 진수영 작가가 드로잉 프로그램을 맡는다. 미술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입장료는 5000원. 전시는 내년 1월 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