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악스럽던 여름도 조금씩 물러나는 모양새다. 한낮의 햇볕에는 아직 여름이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 바람은 제법 선선하다. 나뭇잎 끝에서도 다음 계절의 기척이 느껴진다. 시나브로 걷기 좋은 계절이 지척에 왔다.
이즈음 길에 나서면 평소 스쳐 지나쳤던 풍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나무의 결, 사람들의 표정, 꽃의 얼굴이 선명해지고 새소리와 풀벌레의 음률이 귓전을 감싼다. 적막을 깨지 않는 그 ‘천연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이 정겹다.
서초에는 저마다 다른 표정의 길이 있다. 숲을 걷고 흙을 밟고 물을 따라 걷는다. 때로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을 느낀다. 용허리공원에서 길마중초록숲길로 접어든다.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이어지지만 자동차 소리는 방음벽과 숲에 한 겹 걸러진다. 나무 그늘 사이로 바람이 들고 매미 소리는 여름 끝자락을 못내 아쉬워한다. 황토 맨발길에서는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걷는다.
서초2교 보행교 근처에는 세계 명화와 민화가 걸려 있다. 길섶에는 수국과 무궁화가 피고 꾸지뽕 열매는 발갛게 익어간다. 뛰는 사람, 이어폰을 꽂은 젊은이, 손자 손을 잡고 걷는 할머니까지 한 폭의 풍경이 돼 일상을 예술로 만든다.
시민들의 목소리도 생생하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중년 여성은 동생 집에 올 때마다 이 길을 찾는다고 했다. 길어서 좋고 잘 닦여 있어 좋단다. 무엇보다 아파트 바로 옆에 이런 길이 있는 게 부럽다며 부산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등산스틱을 짚은 팔순 어르신 말씀도 숲길을 따라 전해졌다. 서초에서 42년을 살았는데 허리 수술 후유증으로 걷기조차 힘들어졌지만 이 길을 걸으며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사색의 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회복의 길이다.
우면산 무장애숲길은 또 다른 얼굴이다. 소망탑으로 향하는 데크길 위로 벌써 나뭇잎이 흩날린다. 강아지를 태운 유아차를 미는 사람,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 사람, 흙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전망데크에서는 숲을 건너온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물길도 있다. 양재천에서는 흐르는 물과 나란히 걷는다. 물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머물지 않는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생각이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듯하다. 반포천 산책길은 일상에 더 가깝다. 슬리퍼 하나 끌고 집을 나서도 금세 걷기 좋은 길과 만나는 ‘슬세권’이다.
숲길, 흙길, 맨발길, 물길. 모습은 달라도 길 위 사람들의 결은 같다. 건강을 위해 뛰고 걷고, 생각을 비우려 걷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걷는다. 빠르게 뛰어도 느리게 걸어도 길은 모두 받아준다.
길은 우리네 인생과 닮아 있다. 곧은 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인다. 길 위에 있으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어렴풋이 배운다. 서두르지 말 것. 힘들면 잠시 쉬어갈 것.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볼 것. 사람이 길을 찾으면, 길은 길로 화답한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그리고 부디, 행복하게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