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글로벌 경제를 혁신하더라도 미국 기술주의 주가 조정은 나타날 수 있고 그 충격이 전 세계로 번질 수 있다는 유럽중앙은행(ECB)의 경고가 나왔다. AI 기대가 주가에 과도하게 반영된 상황에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면 기술주 하락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관련주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CB는 이날 블로그를 통해 현재의 주식시장 밸류에이션이 합리적인 기대를 반영하고 있더라도 향후 조정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 주식시장의 밸류에이션은 경기조정 주가수익비율(CAPE)을 기준으로 역사적 고점에 근접한 상태다. 유로존 증시의 밸류에이션도 미국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최근 수년간 상승세를 이어왔다.
ECB는 AI가 경제와 기업 이익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기술이라는 점과 별개로, 기술혁명 과정에서는 자산가격의 급등과 급락이 반복돼 왔다고 지적했다. 19세기 철도 투자 붐과 1920년대 전기·라디오 확산, 1990년대 닷컴 열풍 당시에도 혁신 기술을 도입한 기업들의 주가는 급등한 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신기술의 초기 단계에서는 성공 가능성과 향후 이익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 투자자들이 높은 상승 잠재력에 베팅한다. ECB는 엔비디아 주가가 2022년 이후 20배 상승한 것도 회사가 차세대 구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했다.
다만 AI 기술이 실제로 성공하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더라도 주가가 계속 상승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기술 관련 불확실성이 개별 기업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 전체로 확대되면 투자자들이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기업 이익 증가에도 불구하고 주식 밸류에이션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투자자들의 과도한 자신감과 낙관론으로 주가가 펀더멘털을 넘어선 경우에는 조정 폭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ECB은 분석했다. 다만 AI가 예상보다 강력한 생산성 향상을 이끌 경우 조정 이후에도 장기적으로 현재보다 높은 밸류에이션이 형성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미국 기술주의 급락이 유럽 금융시장으로 번질 가능성도 경고했다. ECB에 따르면 유로존 가계는 투자펀드 등을 통해 미국 기술주에 약 4400억 유로를 투자하고 있다. 보험사와 연기금도 미국 대형 기술주인 '매그니피센트7'에 상당한 규모를 투자하고 있다. 기술주가 급락하면 펀드 환매와 자산 매각이 이어지면서 추가적인 가격 하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ECB는 미국 AI 관련 주식의 급락이 미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유로존의 투자심리와 금융조달 여건, 기업 고용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주식시장 조정이 광범위한 금융시장 불안과 동시에 나타날 경우 유로존 금융안정에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반도체주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나 엔비디아 등락에 실시간으로 연동돼 왔기 때문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의 SK하이닉스 ADR 프리미엄 경고와 엔비디아 순환거래 논란에 이어 중앙은행까지 가세하면서 'AI 밸류에이션이 지속 가능한가'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 모양새다.
다만 ECB가 지목한 위험이 주로 기대만으로 오른 밸류에이션이라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는 반론도 나온다. 두 회사는 장기공급계약(LTA)으로 생산 물량 상당 부분이 이미 확정된 데다 실제 공급 부족이 가격을 끌어올리는 구조이며,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도 3∼4배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최근 한국 성장률 전망을 3.5%로 올리며 "반도체 사이클이 2027년 중반까지 강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진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