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군 함정의 주문이 적체됐으며 상선 건조산업도 국제 경쟁력을 잃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4일 서명한 팩트시트에 적힌 문구다. 백악관은 이날 “미국 조선소 생산 능력과 업체 간 경쟁이 부족하다”며 외국 조선소가 자국의 일부 함정을 건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 함정 사업에 참여할 길이 열린 것이다. 한국 조선업은 국내에서 배를 제조해 수출하던 시기를 지나 동남아시아 등에 생산기지를 확보한 데 이어 이제는 미국 군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한국 조선의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자국 선주가 발주하는 물량이 적다. 중국 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대형 해운사가 많지 않아서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내야 하는데, 높은 인건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 등 규제로 쏟아지는 수주를 제때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에 국내 조선업계는 베트남 등의 조선소를 인수해 생산비를 낮추고 국내에서는 고부가가치 선박의 설계와 엔지니어링 등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동남아가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생산기지라면 미국은 시장을 넓히기 위한 새로운 무대다. 미국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해군력과 거대한 선박 수요가 있다. 미국 조선소를 확보하는 것은 단순히 현지에서 배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설계·엔지니어링과 핵심 기자재, 자동화·스마트조선 기술 등이 함께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축포를 터뜨릴 수는 없다. 한국이 미국 조선업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만큼 사업 기회를 확보하지 못하면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를 위한 일방적인 지원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기술 이전, 현지 인력·공급망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감안하면 한국 기업의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 몇 척의 배를 지었느냐가 아니다. 미국 시장을 한국 조선 생태계의 새로운 성장판으로 키우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이 미국의 조선 인력 양성과 생산 기반 회복을 돕는 대신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등 미국 기술을 국내 조선업에 접목하는 협력도 추진할 만하다.
백악관은 이번 팩트시트에서 “국가 안보와 경제 번영에 필수적인 조선 산업을 재건하려고 한다”고 했다. 미국은 한때 조선 강국이었지만 그 경쟁력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 역시 조선업을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지금의 호황에 안주하지 않고 미국과의 협력에서 무엇을 얻어낼지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