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개발자 '48쪽 마지막 게임'…18년 넥슨 천하 무너졌다

입력 2026-08-13 20:00
16년간 뚜렷한 흥행작을 내지 못했다. 3차례 내놓은 게임은 번번이 외면받았다. 마흔을 갓 넘긴 무명의 개발자는 마지막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다. 당시 생소하던 배틀로얄(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게임) 장르였다. 이렇게 탄생한 게임이 크래프톤의 ‘배틀그라운드(배그)’다. 개발자는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 김 대표는 2018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아무도 못한 걸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회상했다.


10년 뒤인 올해 2분기 크래프톤은 배그를 발판으로 매출 1조2902억원, 영업이익 4109억원으로 2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2008년 이후 부동의 국내 1위 게임사인 넥슨(매출 1조1390억원·영업이익 2943억원)을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모두 제쳤다.◇김창한의 베팅·지원한 장병규KAIST 전산학과를 졸업한 김 대표는 2000년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다. ‘세피로스’ ‘펀치몬스터’ ‘데빌리언’ 등의 개발에 참여했지만,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전환점은 2015년 김 대표가 이끌던 지노게임즈가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세운 블루홀에 인수되면서 찾아왔다. 그는 또 하나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대신 배틀로얄을 선택했다. 모바일게임과 MMORPG가 시장을 지배하던 때였다. 김 대표는 48쪽짜리 기획서로 경영진을 설득했다. 국내에서 성공한 뒤 해외로 나가는 공식도 버렸다. 처음부터 글로벌 PC 이용자를 겨냥해 스팀에 출시한다는 구상을 적었다.

장 의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검증되지 않은 장르에 돈과 사람을 투입했다. 배그의 성공을 김 대표 개인의 집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장 의장은 김 대표의 반복된 실패를 퇴출 사유로 삼지 않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에 다시 베팅했다. 이를 믿은 김 대표는 배틀로얄 장르의 원형을 만든 아일랜드 개발자 브렌던 그린도 영입하며 힘을 냈다.◇脫배그가 향후 성장에 관건개발진 30여 명이 1년 남짓 매달렸고, 2017년 결과물이 나왔다. 글로벌 게임사들이 신작을 내놓으면 먼저 올리는 스팀얼리액세스에 떨리는 마음으로 선보였다. 결과는 대성공. 세계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확인했다. 스팀 동시접속자는 300만 명을 넘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흥행으로 시작한 K게임의 탄생이었다.

장 의장은 김 대표에게 2020년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맡겼다. 김창한의 크래프톤은 이후 배그를 모바일·콘솔, 인도, e스포츠 등으로 확장해 프랜차이즈로 키워냈다. 출시 9년이 지난 올해에도 배그는 크래프톤을 책임지고 있다. 김 대표는 당시 “배틀그라운드를 영화·만화 등으로 확장해 10년 이상 가는 프랜차이즈 IP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크래프톤이 국내 1위 넥슨을 실적으로 제친 건 연간이 아니라 분기 기준이다. 넥슨을 넘어섰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얘기다. 넥슨엔 메이플스토리와 던전앤파이터, FC온라인 등 대형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게임이 포진해 있다. 특정 게임의 성과가 흔들리더라도 다른 IP가 실적을 떠받치는 구조다. 반면 크래프톤은 여전히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크래프톤이 ‘제2의 배그’를 내놓는 데 사활을 거는 이유다. 자체 개발과 해외 스튜디오 투자를 병행하며 배그 밖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인조이’와 ‘서브노티카2’ 등 슈팅게임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도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크래프톤은 현재 15개 신규 프로젝트도 개발하고 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