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영상과 이미지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뜻밖에도 '시'의 새로운 독자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에선 SNS를 통해 독자를 모은 시인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한국에선 10·20대가 시집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어렵고 학구적인 문학으로 여겨졌던 시가 사랑과 상실, 불안과 위로를 짧고 강렬하게 전달하는 콘텐츠로 다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는 2700년 전 호메로스도 있다.
11일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의 올해 시 부문 매출은 사상 처음 1500만파운드(약 287억원)를 넘어설 전망이다. 올 들어 7월까지 매출만 800만파운드(약 153억원)를 돌파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3% 증가했다.
여기에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흥행이 한몫했다. 영미권에서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다룬 <오디세이아>가 서사시(epic poem)로 시 부문에 포함된다. 영화 개봉 앞뒤 4주간 영국에서 <오디세이아> 종이책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1400% 급증했고, 미국에서도 올해 들어 76% 늘었다. 오디세이아와 짝을 이루는 <일리아스>까지 포함하면 올해 영국 시 부문 매출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그런데 정작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놀런 효과'를 걷어내고 난 뒤의 숫자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를 제외해도 영국 시 부문 매출은 올해 지난해보다 7.2% 늘었다. 게다가 2023~2025년은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시 부문 매출이 가장 많았던 3년이기도 하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낸 반짝 특수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 시장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영미권 출판시장은 이를 '시의 귀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SNS가 있다. 영미권에선 인스타그램을 통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루피 카우르에 이어 최근에는 루카스 존스, 도나 애쉬워드, 니키타 길 등이 SNS와 짧은 영상을 통해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한두 구절이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되고, 낭독 영상이 틱톡을 타고 퍼지면서 시가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비슷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포착된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10·20대의 시집 구매량은 전년보다 51.9% 증가했다. 특히 10대는 97.2%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10대의 시집 구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28.5% 늘며 증가세를 이어갔다.
젊은 작가의 시집을 젊은 독자가 찾는 경향도 뚜렷하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러브 온 더 락>, <토마토 컵라면> 등 올 상반기 '젊은 작가의 시집 베스트셀러' 5종 구매자 가운데 10·20대 비중은 34.9~51.2%에 달했다. 5종 모두 20대가 가장 큰 구매층이었다.
예스24 관계자는 "포엠매거진 등 SNS 기반 시·문학 큐레이션 계정을 통해 시와 시집 관련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재생산·확산되면서 젊은 독자들의 유입 접점도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짧은 호흡에 감정과 의미가 응축된 시의 형식이 숏폼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함축적이고 고요한 언어가 오히려 위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설명이다.
SNS 시대의 시와 2700년 전 호메로스 사이에서 의외의 공통점을 찾는 시각도 있다. 가디언은 "<오디세이아> 역시 본래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며 퍼져나갔던 '원조 바이럴 신화(original viral myth)'였다"며 "2700년 전 구술문학과 오늘날 SNS의 시가 '말하고, 듣고, 공유한다'는 오래된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