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와일드 씽’을 봤습니다. 강동원과 엄태구, 박지현이 한때 잘나갔지만 이제는 잊힌 혼성 댄스그룹의 멤버로 등장하는 코미디입니다. 영화를 보며 자꾸 웃음이 났던 것은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강동원의 머리 모양부터 춤과 의상, 과하게 진지한 무대 매너까지.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한국 대중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저런 게 정말 있었지” 싶은 것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다 미국의 오래된 B급 영화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가끔 완성도와 상관없이 이런 영화들을 재미있게 봅니다. 거기에는 그 시대 미국이 놀랄 만큼 많이 들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사물함과 치어리더, 싸구려 모텔과 다이너, 교외의 단독주택과 낡은 자동차.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입니다.
미국 문화의 힘은 ‘대부’나 ‘스타워즈’ 같은 걸작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가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오랫동안 미국인의 집과 학교, 거리와 생활을 반복해서 보여줬고 그렇게 쌓인 이미지들이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됐습니다.
문화란 어쩌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입었던 옷과 들었던 음악, 먹었던 음식과 놀았던 장소, 당시에는 별 의미 없이 흘려보냈던 생활의 흔적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거대한 기억의 창고입니다.
‘와일드 씽’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에도 이제 그 창고가 제법 커졌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대의 음악다방과 롤러스케이트장, 1990년대의 삐삐와 오락실, 2000년대의 PC방과 싸이월드.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H.O.T.와 젝스키스로 이어지는 아이돌의 역사도 생겼습니다. 편의점과 노래방, 찜질방, 회식과 선후배 문화, 재벌과 입시, 군대와 치맥까지.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 문화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한때 이런 것들은 외국인에게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기생충’의 반지하와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가 세계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국 콘텐츠를 오래 본 외국인이라면 이제 ‘선배’와 ‘회식’, ‘학원’ 같은 말 뒤에 어떤 관계와 감정이 숨어 있는지도 조금씩 짐작합니다.
이것이 문화가 강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세계에 한국을 설명하지만 반복해서 소비되면 설명의 양이 줄어듭니다. 미국 영화가 FBI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일본 영화가 이자카야를 매번 소개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 익숙함은 산업적으로도 큰 자산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시장에서 큰 비용 가운데 하나는 낯섦을 없애는 비용입니다. 문화적 친숙함은 시장 진입비용을 낮춥니다. 드라마에서 본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지고, 배우가 입은 옷과 화장품을 찾고, 영화의 배경이 된 거리를 여행하고 싶어집니다. 콘텐츠는 홀로 수출되는 상품이 아니라 음식과 패션, 뷰티, 관광이 따라갈 길을 먼저 닦는 시장 개척자입니다.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문화는 더 흥미로운 자산이 됩니다. 공장은 낡고 기술은 대체됩니다. 산업의 많은 자산에는 감가상각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문화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유행이 지난 노래가 다시 히트하고, 촌스럽던 옷이 빈티지가 됩니다. 부모 세대의 추억이 자녀 세대에게는 새로움이 됩니다. 과거가 다시 IP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는 감가상각이 아니라 복리로 흐릅니다. 미국의 1950년대 로큰롤, 1960년대 히피, 1970년대 디스코, 1980년대 팝문화가 수십 년 동안 계속 다시 호출된 것도 이런 힘 덕분입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향수를 팔고, 그 시대를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팝니다.
한국도 이제 그 단계로 들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와일드 씽’은 1990년대 말 대중음악의 기억을 다시 꺼냅니다. 앞으로 캐낼 것은 더 많습니다. 1990년대 압구정과 신촌, PC통신의 추억과 스타크래프트, IMF 이후의 직장 풍경과 벤처 열풍까지. 당시에는 너무 평범해 누구도 자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고를 넘어섭니다. 문화산업은 지나간 기억을 다시 해석해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시장에 팔 수 있는 형태로 바꿉니다. 잊혔던 캐릭터가 새로운 IP로 살아나고, 오래된 음악과 패션이 다시 상품이 되며, 평범했던 골목이 관광지가 됩니다.
국가의 경쟁력에서도 이런 축적은 중요할 것입니다. 천연자원이 많은 나라는 땅속에서 자원을 캐내고, 기술강국은 특허에서 가치를 만듭니다. 문화강국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캐냅니다.
그래서 문화강국에는 명작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B급 영화도, 실패한 가요도, 촌스러운 패션과 한때 유행했던 말투도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문화의 지층을 만들고, 훗날 누군가는 다시 그곳에서 이야기를 캐냅니다.
한국은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과거를 소비했습니다. 미국의 1950년대를 영화로 배웠고 일본의 과거를 만화로 접했습니다. 이제 반대 방향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한국의 현재뿐 아니라 한국이 지나온 시간까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외국인이 1990년대 한국 아이돌의 촌스러운 머리 모양을 보고 우리처럼 웃는 날도 올 겁니다.
‘와일드 씽’을 보며 웃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느새 꽤 많은 과거가 쌓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는 더 이상 우리끼리 추억하고 끝낼 기억이 아닙니다. 한국에도 이제 세계에 팔 수 있는 과거가 생겼습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