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악가들이 완성한 '링 시리즈'의 드라마 '니벨룽의 반지'

입력 2026-08-09 13:27
수정 2026-08-09 15:21
8대의 콘트라베이스가 길게 끌어낸 극저음 속에서 바그너가 설계한 대서사의 막이 올랐다. 하나의 음 위로 화음이 겹겹이 쌓이더니, 어느덧 115인조 오케스트라 전체가 거대한 물결로 변했다. 무(無)에서 태초의 자연이 생겨나고 햇빛이 일렁이는 라인강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바그너는 '라인의 황금' 전주곡 단 몇 분만으로 신들의 세계가 창조되는 과정을 완벽히 음화(音?)해냈다.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객석에 들어서자마자 무대를 채운 압도적 스케일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4대의 하프와 두 조의 팀파니가 가세한 대편성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 그리고 정상급 성악가들까지 총 142명이 손을 잡고 거대한 신화의 세계를 펼쳐놓았다.

장장 4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었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핵심 장면을 한자리에서 만난 관객들은 매 작품이 끝날 때마다 폭발적인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 한국 성악가들이 증명한 '한국산 반지'의 가능성

첫 작품 '라인의 황금'부터 대형 오케스트라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극저음에서 출발한 라인강의 모티브는 음과 화음을 켜켜이 더하며 거대한 음향의 흐름을 형성했다.
바그너 음악의 핵심인 '라이트모티프(Leitmotif·주도동기)'는 단순한 주제 선율을 넘어선다. 황금, 반지, 검, 발할라, 영웅, 저주 등 인물과 관념에 음악적 표식을 부여한 뒤 극의 전개에 따라 이를 변형하고 결합한다. 성악가가 노래하지 않는 순간조차 오케스트라는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암시하며 '또 하나의 화자'로 존재감을 발휘한다.

무대를 채운 한국 성악가들의 기량 또한 압도적이었다. 보탄 역의 바리톤 최인식과 도너 역의 바리톤 김기훈은 우렁찬 음색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신들의 세계에 무게감을 더했다. 특히 김기훈은 신화 속 망치를 소품으로 활용하며 당당한 주신(神)의 면모를 각인시켰다.


거인족 형제 파졸트와 파프너를 맡은 베이스 전태현과 박성민의 등장도 강렬했다. 206cm의 장신 박성민이 고개를 숙이며 무대에 들어서자, 오케스트라는 거인의 위압적인 등장을 알리는 음악을 폭발시켰다. 콘서트 오페라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각적·음악적 쾌감이 연출된 순간이다. 메조소프라노 정주연 역시 '라인강의 처녀'부터 후반부 태고의 여신 '에르다'까지 안정적이고 깊이 있는 음색으로 무대를 받쳤다.


'발퀴레'에서는 최인식의 존재감이 한층 빛났다. 딸 브륀힐데를 향한 애정과 신들의 규율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탄의 고별' 대목에서, 그는 절대자의 권위와 아비의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잘 있거라, 용감하고 고귀한 아이야"라며 이별을 고하는 대목의 발성과 표정 연기는 장내를 숨죽이게 했다. 지그문트 역의 테너 김승직은 바그너 음악이 지닌 극적인 로맨티시즘을 서정적 가창으로 풀어냈고, 지클린데 역의 소프라노 김은희는 정확한 피치와 풍부한 성량으로 무대를 채웠다.

3부 '지그프리트'에서는 '헬덴테너(영웅적 테너)' 김재형의 도전이 눈길을 끌었다. 정제되지 않은 야성에서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소리와 표정의 변주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번이 해당 역할 데뷔 무대였던 김재형은 "등장 직후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관객들의 환호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다"며 소회를 전했다.

마지막 '신들의 황혼'은 군터(김기훈), 지그프리트(김재형), 브륀힐데(이명주), 하겐(사무엘 윤)이 어우러져 비극의 절정을 이뤘다. 욕망으로 시작된 저주가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브륀힐데의 장엄한 희생을 거쳐 신들의 세계가 파멸하는 결말로 치달을 때의 몰입감은 단연 최상이었다.

◇ 알베리히에서 하겐까지...4부작 관통한 사무엘 윤의 존재감
이날 바그너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 개념을 무대 위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구현한 이는 단연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이었다. 그는 1부 '라인의 황금'에서 탐욕에 사로잡힌 알베리히를, 4부 '신들의 황혼'에서는 그 아들 하겐을 연기했다. 저주를 시작한 아버지와 그 저주를 완결 짓는 아들을 한 인물에게 맡겨 4부작의 수미상관을 완성한 것은 이번 캐스팅의 가장 영리한 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비롯한 세계적 무대에서 검증된 그의 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명확한 독일어 딕션과 115인조 오케스트라의 숲을 뚫고 나오는 음성 전달력은 물론, 노래와 연기가 하나로 일치하는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했다. 조롱당한 자의 열등감과 분노, 냉혹한 모략가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관객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 115명이 쏟아낸 황금빛 사운드...'웰 메이드 자막'의 승리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은 115인조의 대음향을 정교하게 제어하며 성악가들의 호흡을 완벽하게 받쳤다. 특히 지그프리트의 시신이 운구될 때 울려 퍼진 장엄하고 비통한 '장송행진곡'은 단연 이날 연주의 하이라이트였다.


원작 기준 15시간에 달하는 대작을 4시간으로 압축하는 시도는 자칫 단편적인 '갈라 콘서트'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촘촘한 서사의 고리를 놓치지 않았다. 일등 공신은 공연기획사 아트앤아티스트의 '웰메이드 자막'이었다. 단순 가사 번역을 넘어 장면 전환 시 줄거리와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해설 자막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초심자도 축약본의 서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전막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한 관객의 평처럼, 이번 하이라이트 공연은 15시간짜리 바그너의 거대한 우주로 관객을 이끄는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본 공연은 오는 14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한 차례 더 관객을 찾아간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