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바라지 53년 받고 '결혼해 준' 남자…2주 뒤 벌어진 비극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8-08 09:19
수정 2026-08-08 09:46

"신랑은 신부를 영원히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

새신랑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새신랑은 일흔일곱 살.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만한 나이였으니까요. 옆에 있던 새신랑의 지인이 보다못해 귀띔해 줬습니다. “빨리 ‘네’라고 하세요.” 그제야 새신랑은 주례의 말에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새신부의 나이는 새신랑과 네 살 차이인 일흔세 살. 두 사람은 이날까지 53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들을 낳았고, 가난을 같이 견뎠고, 함께 늙었습니다. 신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신랑은 세계적인 예술 거장으로 우뚝 섰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바로 신랑의 이름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은 왜 반세기를 함께 산 여자와 이제야, 그것도 떠밀리다시피 결혼식을 올렸을까요. 그 답을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댕의 삶, 그리고 남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예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대 세 번 떨어진 조각 거장로댕은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꾸지 못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데다 작가가 되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댕은 실업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건물이나 가구에 붙는 장식을 만드는 기능공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댕의 실력이 너무나도 탁월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 전문 예술가를 해도 되겠는데." 로댕에게 작가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나도 예술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용기를 얻은 로댕은 프랑스 최고 미술 명문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낙방. 그림 시험은 통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각 시험에서 탈락했습니다. 로댕은 이듬해 다시 도전했습니다. 결과는 또다시 낙방. 그다음 해 마지막으로 미대에 도전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근대 조각 최고의 거장이 조각 때문에 미대에서 세 번이나 떨어진 겁니다. 전기 작가 루스 버틀러는 여기에 대해 "로댕이 추구하는 스타일과 교수들의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시 조각이란 '정교하고 완벽하게 다듬은 것'. 반면 로댕은 거칠지만 움직임과 감정이 살아 있는, 실업학교에서 배운 '실전 미술'을 했다는 겁니다.

미대에 떨어진 이후 로댕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안 돼 로댕이 의지하던 누나까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큰 충격을 받은 로댕은 속세를 떠나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도 그의 재능은 감춰지지 않았습니다. 낡은 수도원 건물을 손볼 때나 장식을 할 때마다 그의 뛰어난 솜씨가 드러났습니다. 그걸 눈여겨본 신부님은 몇 달 후 로댕을 속세로 다시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그대를 이 길로 부르지 않으셨네. 여긴 자네가 있을 곳이 아닐세. 돌아가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게나."


수도원을 나온 로댕이 바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돌아온 뒤 장식 조각공으로 취업해 2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실력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소유한 공방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탓에 로댕이라는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로댕은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내게 재능이 있는 줄 몰랐다. 기술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나를 노동자 이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로댕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기 작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에 만난 재봉사, 로즈 뵈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이었습니다.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로즈는 로댕과 함께 살며 삯바느질로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탰습니다. 이 시절 로댕을 보여주는 조각이 '코가 깨진 남자'입니다. 난방도 제대로 못 땐 로댕의 작업실이 어찌나 추웠는지, 어느 겨울 점토 조각상의 뒤통수가 얼어 깨져 나갔습니다. 로댕은 이를 그대로 작품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서른여섯이 되던 1876년. 돈을 모아 어렵사리 떠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납니다. 300년 전 세상을 떠난 미켈란젤로였습니다. 로댕은 로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위대한 마법사가 나에게 비밀 몇 개를 알려줄 것 같아." "사기꾼 아냐?"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로댕은 작업실에서 회심의 역작을 준비합니다. 벌거벗은 남자를 묘사한 실물 크기의 조각상. 근육 하나가 만드는 그늘 하나까지 정확히 묘사하느라, 조각 하나를 완성하는 데 1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 '청동시대'가 1877년 파리에 전시되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진짜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댕을 칭찬하기는커녕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건 조각이 아니야. 사람 몸에 직접 석고를 부어 본뜬 게 분명해."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서 석고를 떴을지도 몰라." 너무 작품을 잘 만들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로댕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그는 결백을 호소했습니다. "한번 작업실에 와서 조사해 보세요." 이런 사태를 보다 못한 당대의 유명 조각가 여섯 명이 "로댕의 실력은 진짜"라는 설명을 내고서야 논란은 진정됐습니다.


이 사건에서 깨달음을 얻은 로댕은 다음 작품 '설교하는 세례 요한'을 실물보다 크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조각, 자세히 보면 이상합니다. 성큼성큼 걷는 사람인데 두 발이 모두 땅에 붙어 있거든요. 실제로 이렇게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늘 한 발은 공중에 떠 있지요.

로댕이 이런 조각을 만든 건 실력이 미숙해서도, '본뜨기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청동시대'가 논란이 됐을 때 로댕은 생각했습니다. '똑같이 만드는 게 전부라면, 조각이 석고 본뜨기와 다를 건 뭔가. 표면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본질까지 조각해야겠다.' 그래서 로댕은 뒷발이 땅을 밀어내는 순간과 앞발이 무게를 받는 순간, 걸음의 처음과 끝을 한 몸에 겹쳐 넣었습니다. 물론 이런 묘사는 실제와 다릅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작품을 실제로 보면, 청동으로 된 세례 요한이 관객에게 걸어오며 설교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조각을 '진짜처럼' 깎은 조각가들은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이전에도 꽤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한순간을 골라 마치 사진을 찍듯 이를 조각으로 표현했습니다. 반면 로댕은 사건의 본질을 담은 자세를 '만들어서' 조각했습니다.

미술사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전근대 조각'과 '근대 조각'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는 걸 진짜처럼 재현하는 데서 멈추면 전근대 조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러니까 움직임과 감정과 본질까지 형태로 빚어내면 근대 조각으로 분류됩니다. 로댕이 '최초의 근대 조각가',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새로움을 미술계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논란의 '청동시대'를 사들였고, 혹평 일색이던 미술계에서도 로댕을 주목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80년, 이름값이 오른 로댕에게 새로 지을 미술관의 정문 제작이 맡겨집니다. 주제는 단테 '신곡'의 지옥편. 훗날 '지옥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고, 이 중 일부는 '생각하는 사람'이라 불릴 이 문에 로댕은 남은 인생 37년을 통째로 걸게 됩니다.

생각하는 사람하지만 이 문이 미술관의 정문에 설치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미술관 건립 계획이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작가라면 적당히 작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을 겁니다.

그런데 로댕은 달랐습니다. 마감이 사라지자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만족할 때까지 작업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는 이 작품을 끝없이 고쳤습니다. 높이 6m의 문틀에 200명 넘는 인물을 만들어 붙였다 떼기를 죽을 때까지 반복한 겁니다.



그리고 그 미완성의 문에서 걸작들이 태어났습니다. 문 꼭대기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는 '시인', 곧 단테를 형상화한 인물을 크게 확대한 것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옥에 넣으려던 연인 조각은 둘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로 문에서 빠졌습니다. 독립한 그 조각의 이름이 '입맞춤'입니다.

사람들은 로댕의 조각에 열광했습니다. 이전의 조각과는 느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비드와 골리앗 이야기를 모르면,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상도 '커다란 흰색 돌을 탁월한 솜씨로 깎아 만든 벌거벗은 아저씨'로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전투 직전 잔뜩 긴장한 목의 힘줄, 돌멩이를 꽉 쥔 오른쪽 손등에서 튀어나온 핏줄, 눈빛에 담긴 결연한 전의(戰意) 같은 것들에 주목하기가 힘들지요. 그런데 로댕의 몸은 그런 '예습'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끌어안은 두 몸은 '사랑', 웅크린 남자는 '고뇌'. 지식이 있든 없든, 보는 순간 즉시 감정이 전해졌습니다.



로댕은 점점 더 선배 조각가들이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대신 손가락 자국과 흙 주무른 흔적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우툴두툴한 표면 위에서 빛이 부서지며 일렁이자, 청동이 살아 있는 살갗처럼 숨쉬기 시작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붓자국으로 벌인 혁명을 조각에서 혼자 해낸 셈입니다. 다만 방향은 반대였습니다. 인상파가 눈에 비친 빛의 순간과 세상의 '겉모습'을 담으려 했다면, 로댕의 목적은 일렁이는 표면에서 그 아래의 감정이 배어 나오게 하는 것. 언제나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게 로댕의 목표였습니다.

급기야 로댕은 머리도 팔도 없는 몸통을 작품으로 내놓게 됩니다. 몸통만 있는 조각들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이는 모두 세월의 풍파에 부서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몸통만 있는 작품을 일부러 '완성작'이라며 내놓은 건 로댕이 처음이었습니다. 감정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게 로댕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무렵 로댕 앞으로 또 하나의 주문이 와 있었습니다. 프랑스 문학의 거인,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기념 조각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생략하다19세기 후반 파리에는 동상이 넘쳐났습니다. 광장마다 코트를 입은 위인의 동상이 서 있었지요. 다들 형식을 갖춰서 잘 만들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아무도 이 동상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다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위인 동상에는 '공식'이 있었거든요. 얼굴은 실물과 닮게, 손이나 곁에는 그 사람을 설명하는 물건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댕도 처음에는 이 공식을 따랐습니다. 발자크는 작가. 손에 펜과 책을 들려줘야겠지요. 얼굴과 몸은 최대한 닮게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 발자크가 죽은 지 4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로댕은 초상화와 사진을 모으고, 발자크의 고향에 내려가 체형이 비슷한 주민들을 스케치하고, 단골 재단사를 수소문해 치수 그대로 옷을 지어 입혀 봤습니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자크에 대해 파고들기를 햇수로 7년째. 로댕은 갑자기 이때까지 모은 자료를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1년 뒤, 3m 높이의 발자크상이 공개됩니다. 그 작품 앞에서 모두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발자크의 얼굴은 알아보기도 어려웠습니다. 펜도 책도 없었습니다. 밤에 글을 쓸 때 입던 헐렁한 실내 가운 한 벌이 전부. 마치 작품은 하나의 덩어리 같았습니다. 파리는 뒤집혔습니다. "자루 속 두꺼비", "소나기 맞은 소금 덩어리" 같은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작품을 발주한 문인협회는 "발자크상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조각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착수금을 돌려준 뒤 조각을 집으로 가져가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훗날 로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내 인생 전부를 녹인 것이다. 이 작품을 구상한 날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로댕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발자크의 본질은 이목구비가 아니다. 사실적인 작품을 만드는 건 그저 껍데기만 표현할 뿐이다. 낮에는 자고, 밤이 되면 가운을 걸친 채 커피를 들이켜며 종이 위에 수천 명의 인간을 창조하던 사람. 그것이 발자크의 본질이다. 그 '창조하는 순간'의 에너지를 표현해야 발자크라고 할 수 있다. 몸을 삼킨 가운은, 뒤로 젖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창작의 힘줄'처럼 하나로 집중한 창작의 자세다.' 그래서 로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은 오직 '그것다운' 것만이 아름답다."

로댕의 이런 철학이 잘 드러난 또 다른 작품이 '칼레의 시민'입니다.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칼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작품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에 걸쳐 싸우던 백년전쟁 시기. 칼레는 영국에 맞서 1346년 9월부터 1347년 8월까지 1년에 걸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함락되고 맙니다. 영국의 왕(에드워드 3세)은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준 칼레를 괘씸하게 여겼고, 칼레에 "대표로 처형당할 여섯 명을 보내지 않으면 주민을 몰살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때 사회 지도층 여섯 명이 "우리가 희생하겠다"고 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은 이들을 살려줬다는 스토리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설명하는 일화로 쓰입니다.


칼레시가 로댕에게 '칼레의 시민'을 주제로 작품을 의뢰한 건,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당당한 모습일 줄 알았던 영웅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며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었거든요. 주문자들은 물론 시민들도 당황했습니다. "왜 우리의 영웅을 이렇게 초라하게 묘사했느냐." 하지만 차차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은 누구나 두려운 법.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신을 희생하러 걸어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 영웅적인 장면이라는 것을요.

이처럼 로댕의 작품에는 늘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의 위대함을 깨닫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기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로댕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조각 거장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로댕이 단독 전시관을 세웠을 때, 유럽의 왕족과 부호들이 초상 주문을 하려고 줄을 선 건 이런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대에 세 번 떨어졌던 장식 조각공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온 로댕의 곁에는, 늘 그를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하던 로즈가 있었습니다. 로즈를 떠올리다이제 맨 처음의 결혼식으로 돌아갈 차례입니다. 로댕은 왜 반세기를 함께 살며 헌신한 여자와의 결혼을 그토록 미뤘을까요. 로즈를 버리고 싶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새로운 여성을 만나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요. 그보다 로댕이 로즈의 마음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울 듯 합니다. 그에게 사람은 언제나 뒷전이었고, 조각이 먼저였습니다.

이런 성향을 감안하면 로댕이 조수였던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을 한때 사랑했던 것도,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조각 재능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손과 발 등 어려운 부분을 그녀에게 맡겼고, 작업의 모든 결정을 그녀와 상의했습니다. "이해받는다는 행복은 내 예술 인생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댕은 끝내 카미유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친 카미유는 그를 떠났습니다. 로댕은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 곁에 있는 사람보다 돌과 청동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세월은 흘렀습니다. 1916년, 일흔여섯의 로댕은 전 재산을 프랑스에 기증했습니다. 조각과 드로잉, 수집품과 저작권까지 전부.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자신이 작업실로 쓰던 파리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작품을 보존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오늘날 파리 로댕미술관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맨 처음의 그 결혼식이 열린 건 이듬해 1월입니다. 이 결혼조차 로댕이 자발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증 심사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문제가 되자, 주변 사람들이 로댕을 떠밀다시피 해서 성사시킨 일이었지요. 그렇게 53년 동안 돌 같은 남자와 살던 로즈는 마침내 '로즈 로댕'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2주 뒤 그녀는 숨을 거뒀습니다. 기관지염이 폐렴으로 번진 탓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홉 달 뒤 로댕도 같은 집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습니다. 그 후 로댕은 로즈 옆에 묻혔습니다.



로즈는 무슨 마음으로 53년을 견뎠을까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로즈는 일기도 회고록도 남기지 못했으니까요. 그녀에 관해 남은 기록은 로댕이 여행지에서 보낸 편지 속 당부 정도입니다. "점토가 마르지 않게 젖은 천을 갈아 줘. 손가락으로 눌러서 확인해 보고."

로댕이 집을 비운 사이, 로즈는 그 젖은 천을 갈며 제작 중인 조각상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아는 로댕의 걸작들은 대부분 그 축축한 천 아래에서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사람에게 평생 무심했던 로댕의 조각이 그 어떤 작가의 조각보다 인간적인 건, 점토가 마르지 않게 눌러 보던 손가락에 담긴 로즈의 복잡한 마음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i>*이번 기사는 Ruth Butler의 'Rodin: The Shape of Genius'를 중심으로, Auguste Rodin·Paul Gsell의 'L'Art', Antoinette Le Normand-Romain 외 편의 'Camille Claudel & Rodin: Fateful Encounter' 도록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룬 기사는 인터넷 기사 <"나야 그 여자야 선택해"…조강지처 쫓아내려던 천재, 결국은>, 책 <명화의 발견-그때 그 사람>에서 자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최근 출간된 책 '명화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