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세상을 떠난 영국의 현대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1937~2026)의 대작을 볼 수 있는 곳이 국내에도 있다. 서울에서 자가용이나 버스로 한 시간을 달리면 나오는 경기 양평 서종면의 구하우스미술관이다. 이곳 거실에 걸린 폭 8.7m짜리 ‘전람회의 그림’(2018)은 호크니가 사진 수백 장을 디지털로 결합해 자신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스튜디오를 통째로 재구성한 ‘사진 드로잉’. 작품 앞에 서면 특수 안경 없이도 화면 속 공간을 거니는 듯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2016년 문을 연 구하우스미술관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개관식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연 이 작은 미술관은 입소문을 타고 매달 2000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찾는 미술관이 됐다. 서울 밖 사립미술관으로는 이례적인 수치다. 구정순 구하우스 관장(75)을 만나 그 비결을 들어봤다.‘로고왕’이 40년 쏟은 ‘집’
흰 벽에 작품만 거는 여느 미술관과 달리 전시장은 거실과 서재, 침실 같은 방으로 나뉘어 있다. ‘작품과 함께하는 집’ 콘셉트로 건물을 짓고 꾸몄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구‘하우스’다. 작품들도 범상치 않다. 전국 중소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색화와 얌전한 회화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감각적인 색상의 설치 작품, 개념미술, 미디어아트 등 톡톡 튀는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구 관장은 “시내 갤러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할 거라면 미술관을 짓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구 관장은 국민은행과 CGV 등 대기업의 로고를 제작하며 ‘로고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디자이너다. 국내 최초 기업이미지통합(CI) 전문회사 디자인포커스를 이끌며 큰돈을 벌었다. 미술관을 짓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마흔 살 무렵인 1990년께. 처음에는 서울 청담동에 미술관을 지으려고 했지만 땅이 좁았다. 우여곡절 끝에 시골집이 있던 양평에 미술관 터를 잡았고, 베네치아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2014년) 건축가 조민석의 설계로 2016년 문을 열었다.
집을 표방한 만큼 문턱이 낮다. 입구 쪽 복도에는 수십 개의 디자인 의자가 늘어서 있다. 색을 검정으로 통일해 의자마다 다른 선과 소재를 비교하도록 했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찾아와 앉아봤다는 조지 나카시마의 나무 의자도 이 집에 있다.
미술관 곳곳에서는 이 집의 마스코트인 스탠더드 푸들 ‘융’이 관람객을 맞는다. 방문객 역시 반려견과 함께 입장할 수 있다. 야생화와 들풀로 채운 정원은 아름답기로 이름나 2021년 ‘양평정원’으로 선정됐다. 구 관장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풀을 손본다”고 했다.“여기는 돈 쓰는 곳”소장품 면면이 화려하다.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마우리치오 카텔란, 루이즈 부르주아, 제임스 터렐, 우고 론디노네…. 구 관장이 반세기 가까이 디자이너로 일하며 다져진 안목이 그대로 녹아 있다. 초현실주의 거장 막스 에른스트의 침대 작품 앞에서는 외국 작가들이 “어떻게 이런 작품이 한국에 있냐”며 놀랄 정도다.
명성을 보고 모은 건 아니다. 구 관장은 “나는 ‘날라리 컬렉터’”라며 “투자 가치나 미술사는커녕 작가 이름도 모르고 그냥 사는 때가 많다”고 했다. 구매 기준은 딱 하나, ‘재미’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콘셉트가 재미있는 작품만 삽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미술관과 달리 이곳을 좋아하는 남성 관람객이 많아요. 남자는 작품에서 늘 스토리를 찾거든요. 그래서 저는 구하우스를 ‘부인을 따라 주말에 왔다가 남편이 더 좋아하는 미술관’이라고 소개합니다.”
미술관 유지에는 매달 3000만~4000만원이 든다. 관람료로 충당하기엔 턱도 없다. 하지만 구 관장은 ‘적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처음부터 돈 쓰려고 만든 곳이에요. 이곳을 찾은 관람객이 ‘감사하다’고 할 때마다 기쁨을 느낍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람객층은 어린이다. 당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관 건립을 검토했을 정도다. 구 관장은 “작품이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줬으면 한다”고 했다. 그래서 미술관에는 인근 학교 학생이 자주 견학을 온다. 양평군과 손잡고 지난해부터 2028년까지 4년에 걸쳐 기후위기 전시를 여는 것도 어린이와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다. 미술관을 찾은 아이들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실천할 일들을 물에 녹는 특수 친환경 종이에 적을 수 있다.“무명 작가 발굴하고 싶어”지금 구하우스에서는 개관 10주년 특별전 ‘조아나 바스콘셀로스: 공존을 잇고 엮다’가 한창이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바스콘셀로스는 바느질과 코바늘뜨기 등 수공예 기법을 사용해 대형 설치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구하우스의 다른 소장품처럼 선명한 색채, 시선을 확 끄는 조형이 작품의 특징이다. 특별전은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린다.
구 관장은 최근 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다. 미술관을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다. 그는 “그냥 집에서 소장품을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미술관이지만 이제는 책임감을 느낀다”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좋은 작가를 발굴해 관객에게 소개하는 미술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술관을 가려면 사실상 자가용 이용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난해 6월 버스가 뚫려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쉬워졌다. 잠실광역환승센터에서 2301번 광역버스를 타면 미술관 인근 문호리 종점까지 한 번에 닿는다. 미술관 옆 파란 건물에서는 하룻밤 묵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뮤지엄 스테이’도 운영한다.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어린이 8000원.
양평=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