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산업의 네 번째 변곡점, 해자는 모델에서 인프라로 이동한다

입력 2026-08-09 05:01


인공지능(AI) 산업은 다시 한번 익숙한 공포와 마주하고 있다. 2022년 말 GPT-3.5가 등장했을 때는 생성형 AI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2025년 초 딥시크 R1이 공개됐을 때는 더 적은 비용으로 고성능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AI 인프라 과잉투자론을 자극했다. 이후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가 확산되자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의 수익모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스포칼립스’ 우려가 커졌다. 그리고 지금 키미(Kimi) K3를 비롯한 중국 공개형 모델이 미국의 최상위 폐쇄형 모델 성능을 빠르게 따라잡으면서 AI 산업은 네 번째 변곡점에 진입했다.

◆공개형 AI 확산이 바꾼 경쟁 공식

이번 변화의 핵심은 단순히 중국 AI의 기술 추격이 아니다. AI 산업의 중심축이 ‘폐쇄형 모델의 독점적 서비스’에서 ‘공개형 모델을 구동하는 인프라 서비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폐쇄형 모델은 모델의 가중치와 구조를 공개하지 않고 사용자가 개발사의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나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만 연산 결과를 이용하도록 한다. 반면 공개형 모델은 가중치를 내려받아 자체 서버나 클라우드 환경에서 실행할 수 있다. 라이선스가 무료인 경우에도 컴퓨팅, 전력, 네트워크와 운영비는 발생하지만 고객은 더 이상 특정 모델 사업자의 API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7월 이후 이러한 변화는 숫자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키미 K3와 큐원(Qwen) 계열의 초대형 공개형 모델은 미국 프런티어 모델에 근접한 성능을 보여줬고 딥시크의 최신 모델은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는 비용을 미국 폐쇄형 모델 대비 크게 낮췄다. 공개형 모델의 이용 비중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이는 오픈AI, 앤트로픽, 구글과 같은 프런티어 기업의 기술력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독점적 모델 접근권을 바탕으로 높은 API 가격과 매출총이익률을 유지해온 사업구조에는 분명한 압박이다. 모델 성능 격차가 좁아질수록 가격의 기준점은 ‘독점 가치’에서 ‘실제 추론 원가’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장이 자주 범하는 오류가 있다. 프런티어 모델의 마진이 낮아지면 AI 인프라 투자도 둔화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형 모델의 확산은 인프라의 중요성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같은 모델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면 경쟁력은 모델 이름이 아니라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낮은 비용에 서비스를 제공하느냐에서 결정된다.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고속 네트워크, 스토리지, 전력, 냉각, 그리고 서빙 소프트웨어의 조합이 토큰 처리속도와 지연시간, 가동률을 좌우한다. 실제로 동일한 공개형 모델도 추론 서비스 사업자에 따라 처리속도와 가격이 크게 다르다. 모델을 고정한 상태에서도 성능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해자가 인프라에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터넷 산업의 초기 변화와도 닮았다. 범용 소프트웨어가 보급될수록 소프트웨어 자체의 희소성은 낮아졌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의 가치는 오히려 커졌다. 공개형 AI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모델의 가중치는 공유되지만 이를 기업 내부 데이터에 맞게 최적화하고 보안을 유지하며 대규모 트래픽을 처리하는 역량은 공유되지 않는다. 결국 고객이 지불하는 비용의 중심은 지식재산권 사용료에서 연산과 운영비로 이동한다. AI 산업의 해자가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에서 인프라 효율성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투자 주체도 하이퍼스케일러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개형 모델은 기업과 정부가 자체 데이터센터, 온프레미스 서버, 전문 AI 클라우드를 통해 모델을 직접 운영할 유인을 높인다. 미국에서는 반도체·서버·네트워크 기업, 사이버보안 회사, 오픈소스 재단과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가 공개형 AI 생태계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외부 API에 민감한 데이터를 전달하지 않고 내부 환경에서 모델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AI 인프라 투자 주체는 빅테크에서 전문 추론 사업자, 일반 기업, 정부와 통신사로 확산될 수 있다.

공개형 모델의 확산은 AI 시장의 경쟁 단위도 바꾼다. 폐쇄형 모델 시대에는 벤치마크 점수와 신규 기능이 기업가치의 핵심 변수였다면, 앞으로는 같은 모델을 실제 업무 환경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기업 고객은 단순히 토큰 가격만 비교하지 않는다. 응답 지연시간, 동시 처리능력, 장애 발생률, 데이터 보안, 기존 업무 시스템과의 연결 비용까지 합쳐 총소유비용을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추론 서비스 사업자와 클라우드 사업자는 범용 모델 위에 최적화된 컴퓨팅과 네트워크, 보안 및 운영도구를 결합해 차별화한다. 공개형 모델이 평준화를 만드는 영역은 모델 접근권이지 실제 서비스 품질까지는 아니다.

이 변화는 AI 산업의 가치사슬이 축소되기보다 세분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델 개발사는 더 높은 지능과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역할에 집중하고, 인프라 기업은 연산 효율과 공급 안정성을 책임지며, 기업용 소프트웨어와 보안업체는 공개된 모델을 고객의 데이터와 업무 절차에 맞게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미국에서 반도체·인프라, 사이버보안, 기업용 소프트웨어, 오픈소스 재단이 공개형 AI를 중심으로 연합하기 시작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AI의 주도권 경쟁이 단일한 ‘최고 모델’ 경쟁에서 모델, 인프라, 보안, 운영이 결합된 생태계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AI 승자는 인프라가 가른다

물론 AI 투자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빅테크의 설비투자가 영업현금흐름을 넘어서는 구간에 진입했고, 일부 투자가 부채와 부외금융으로 이동하면서 금리 민감도도 높아졌다. 따라서 앞으로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 투자 회수기간을 확인해야 한다. 최근 아마존은 연산 프로세서와 네트워크 투자금의 회수기간이 재무상 서버 상각기간보다 짧다고 설명했다. 딥시크 역시 장비 구입비를 비교적 짧은 기간에 회수할 수 있도록 API 가격을 설정했다고 언급했다. AI 인프라 투자가 지속되기 위한 핵심은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상각이 끝나기 전에 현금으로 회수할 수 있느냐’다.

AI 산업의 네 번의 변곡점마다 시장은 과잉투자와 수익성 악화를 걱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AI의 활용 범위는 넓어졌고 필요한 연산량은 늘었다. 이번에도 폐쇄형 프런티어 기업의 마진 압박과 AI 인프라 수요 확대는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공개형 모델이 소프트웨어의 희소성을 낮추는 대신 이를 구동하는 컴퓨팅과 전력의 희소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향후 AI 산업을 볼 때는 어느 모델이 1위인지보다 누가 동일한 모델을 가장 싸고 빠르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지를 봐야 한다. 네 번째 변곡점의 승자는 모델을 독점한 기업이 아니라 공개된 지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산업화하는 인프라 사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황수욱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