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테크 기업을 창업해 부를 일군 엘리트들이 세계 곳곳에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민간 기업이 도시를 운영하며 혁신을 독려하는 테크 유토피아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온두라스와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은 물론이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기존 국가의 낡은 제도로는 기술 혁신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 모델을 실험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테크 건국’ 실험
코인베이스 최고기술자(CTO) 출신인 발라지 스리니바산은 2024년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인공섬에 있는 미분양 호텔을 임차했다. 여기에 ‘네트워크 스쿨’이라는 이름을 붙여 ‘스타트업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다.
네트워크 스쿨은 창업을 위한 강의와 공동 업무 공간 등을 제공한다. 참가자 모두 자신만의 스타트업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월 1500달러를 내면 입주 자격이 주어지며 숙박 시설, 고급 체육관을 비롯해 건강관리 식단까지 마련돼 있다. 이곳엔 근 2년간 몇백 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스리니바산은 이곳을 ‘궁극적 탈출’의 시작점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시대 전에 세워진 국가들은 뒤떨어진 제도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정치적 양극화 때문에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향하고 있으며 실패해가는 미국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 온라인 공동체를 꾸려 자치권을 획득한 뒤 마지막에는 국가로 인정받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 같은 실험은 지난 2년간 순조롭게 이뤄지는 듯했지만 지난달 말레이시아 당국이 인허가 문제를 들어 운영 중단을 명령하며 난관에 부딪혔다. 스리니바산은 괘념치 않았다. 불과 몇 시간 뒤 “카자흐스탄에 새 캠퍼스를 열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하며 관련 구상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우리 캠퍼스는 세계적인 기술 낙관주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는 포부를 드러냈다. ◇“도시도 상품”…틸·올트먼도 베팅스리니바산의 믿음은 실리콘밸리 엘리트들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 정치 및 사회 제도의 지속 가능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판단하에 기술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동체는 구성원 수익이 중심이 된 시장경제를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영리 도시’(for-profit city)로 불린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영리 도시 120곳이 세계 곳곳에서 건설되고 있다. 온두라스의 ‘프로스페라’, 캘리포니아의 ‘캘리포니아 포에버’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가운데 일부는 피터 틸 페이팔 공동창업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CEO 등이 후원하는 펀드에서 벤처 자금 수억달러를 유치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 이론가 패트리 프리드먼은 영리 도시에 투자하기 위한 벤처 기업 프로노모스캐피털을 창립해 자금을 대고 있다.
양상은 제각각이지만 도시를 민간이 창업하고 운영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본다는 점은 같다. 민간 자본이 주민을 모아 자체 생활 규칙을 설계하고, 주민은 참가비·임대료·수수료 등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다. 예를 들어 주민 1000명으로 구성된 프로스페라는 온두라스 평균보다 세율이 낮고 자체 중재 제도를 갖췄으며 비트코인을 주요 통화 가운데 하나로 사용하는 등 규칙이 있다.
일각에서는 비판이 제기된다. 혁신적 자치 실험으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민주적 통제를 피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질서를 돈으로 확립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운동이 기술 엘리트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뜻하는 ‘테크노 파시즘’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갖춘 엘리트들이 세금, 규제, 민주적 견제를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올리비에 쥐텔 오타고대 교수는 “기술 엘리트들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사라고 자처하지만 실상은 대단히 폐쇄적”이라고 비판했다.
김미리 기자 miri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