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인들이 회사에 매긴 성적표가 1년 새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직장 내 행복도를 나타내는 블라인드지수 50점 이상 기업은 절반 가까이에서 세 곳 중 한 곳 수준으로 줄었고, 30점을 밑도는 기업도 15배로 불었다. 그런데도 회사를 떠나려는 움직임은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다. 회사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옮겨갈 곳이 마땅치 않아 눌러앉았다는 진단이 나온다.'행복 기업' 절반 아래로6일 한경닷컴이 입수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블라인드지수 연간 리포트 2026'에 따르면 지난해 블라인드지수 50점 이상 기업 비중은 전년 47%에서 33%로 14%포인트 줄었다. 같은 기간 30점 미만 기업은 1%에서 15%로 급증했다. 전체 기업의 52%가 30~50점 구간에 몰렸고 70점 이상은 3%에 그쳤다. 지수가 오른 기업이 100여곳에 그치는 동안 내린 기업은 370곳을 넘었다.
블라인드지수는 업무 자율성 등 직무 요인, 상사·동료 관계 등 관계 요인, 윤리·워라밸·복지 등 문화 요인을 토대로 구성원이 한 해 동안 회사에서 느낀 행복도를 측정한 지표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7~12월 재직 인증을 마친 한국 직장인 3만4372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중복 응답을 제거한 1인 1회 자발적 익명 온라인 설문으로, 기업별 최소 표본 기준을 충족한 곳만 분석 대상에 포함했다. 신뢰수준은 95%, 표본오차는 ±0.53%포인트다.
그나마 높은 점수를 받은 기업도 얼굴이 매년 비슷하다는 게 블라인드의 진단이다. 올해 1위는 한국가스공사(85점)였고 SAP코리아와 한국남동발전(82점), 구글코리아(80점)가 뒤를 이었다. 상위 10곳 대부분은 공기업과 외국계였다.소비재는 가라앉고 플랫폼은 갈렸다전반적 하락세 속에서 업종별 희비가 엇갈렸다. 소비재 업계는 대체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롯데웰푸드가 상위 99%로 최하위권이었고 한섬(상위 82%)과 LF(상위 50%)도 부진했다.
플랫폼 업계는 극과 극이었다. 라인플러스와 네이버가 각각 상위 1%, 2%로 최상위권을 지킨 반면 카카오(상위 93%)와 무신사(상위 99%)는 소비재 하위권과 다를 바 없는 성적표를 받았다. 이동통신에서도 LG유플러스와 KT가 나란히 상위 1%, 2%에 오른 것과 달리 SK텔레콤은 상위 45%에 그쳐 3사 안에서도 간극이 벌어졌다.
전년보다 성적을 크게 끌어올린 기업도 업종을 가리지 않고 나왔다. 반도체에서는 동우화인켐이 상위 3%까지 뛰었고 핀테크에서는 카카오페이가 상위 4%로 올라섰다. 은행권의 부산은행(상위 5%), 방송의 KBS(상위 3%)도 상승 폭이 큰 기업으로 꼽혔다.
직군별로는 변호사(54점), 의료인(51점), 의사(50점) 등 전문직이 최상위권을 지킨 가운데 반도체·회로 설계를 맡는 하드웨어 엔지니어(49점)가 처음으로 최상위권에 진입해 눈길을 끌었다. 다만 의료인 지수는 전년보다 10% 넘게 확 빠졌다. 가장 낮은 직군은 기획자(36점), 직업군인(37점), 고객서비스(40점)로 전년과 같았고 이직 의향도 기획자가 가장 높았다.
격차는 어디서 갈린 걸까. 블라인드 AI가 응답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행복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일이 내 인생에도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업무의미감'이었다. 영향력을 100으로 놓으면 사내복지(53)와 워라밸(41)을 2배 이상 앞섰다. 관계 요인 중에서는 업무상 실질적 지원을 해주는 상사와의 관계가 동료 관계나 직장 내 유대감보다 3배 이상 큰 영향력을 보였다. "직장인은 회사의 성장보다 자신의 성장이 체감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는 게 블라인드의 분석이다.
행복도 내렸는데 회사는 안 떠난다행복도가 이렇게 빠졌으면 이직이 늘 법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직시도 점수는 전년 49점에서 51점으로 올랐다. 이 점수는 높을수록 이직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졌는데도 자리를 옮기려는 움직임은 되레 줄었다는 얘기다.
국내 노동시장 통계도 방향이 같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매출 상위 500대 기업 가운데 이직·퇴직률을 공시한 108개사를 분석한 결과 평균 이·퇴직률은 2022년 9.2%에서 2023년 7.8%, 2024년 7.7%로 2년 연속 하락했다. 팬데믹 시기 '대퇴사' 열풍이 식고 불확실한 이직보다 현 직장에 남는 쪽을 택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신재용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지금의 이직 감소는 만족이 아니라 위축된 노동시장에서 나타난 관망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며 "사람은 몸이 회사를 떠나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회사를 떠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몸은 회사에 남아 있어도 마음이 떠난 조직은 활력을 잃는다"며 "이러한 암묵적인 비용은 생산성과 혁신, 협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재무제표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홍민성/김대영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