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사촌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뒤늦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은 시점을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의 출발점으로 인정받아 2000만원 규모의 배상을 받게 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촌오빠는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관으로 파악됐다. “30년 전 가해 행위도 PTSD 진단일로 시효 가능”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85단독은 지난달 21일 A씨가 사촌오빠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B씨는 A씨에게 214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사건은 지난해 10월 접수됐다. B씨는 선고 엿새 후인 지난달 27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가해 행위는 1994년 9월 추석 연휴에 발생했다. 당시 만 10세였던 A씨는 큰집에서 잠을 자던 중 만 17세였던 B씨에게 별도의 방으로 불려가 강제추행을 당했다. 소장에 따르면 A씨는 당시 너무 어려 자신이 겪은 행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며 성폭력 피해를 개인과 가족의 수치로 여기던 사회 분위기 탓에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20대 초반까지는 명절에도 큰집에 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친척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가족 행사에서만 B씨와 간헐적으로 마주쳤다. 반면 B씨는 성인이 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관이 됐다.
A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확산하면서 억눌렀던 기억이 되살아나 불안 증세가 심해졌다고 주장했다. 2019년 5월 처음 심리상담센터를 찾았고 같은 해 7월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며 B씨를 고소하고 싶다고 했지만, 당시 가족 사정 등으로 형사고소는 하지 않았다. 이후 B씨는 A씨 어머니와 통화하며 “A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만 직접적인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A씨는 B씨가 이후에도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30여년 전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이미 시효 만료로 소멸했는지였다. B씨 측은 A씨가 성인이 된 2003년부터 3년 또는 10년이 지났고, 늦어도 처음 심리상담을 받은 2019년부터 3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해자가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 지나도 원칙적으로 청구권이 소멸한다.
법원은 B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가 지난해 8월 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PTSD 진단을 받은 시점에야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손해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나타났다고 판단했다. A씨는 딸의 나이가 자신이 피해를 당한 만 10세에 가까워지면서 불안감이 커져 지난해 7월 상담을 재개했다. 같은 해 8월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딸의 속옷에서 혈흔을 발견한 뒤 과거 피해가 떠올라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A씨가 오랜 기간 피해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온 만큼 자신에게 발생한 손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봤다. A씨는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5000만원과 치료·심리상담비 150만원 등 총 5150만원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위자료는 범행 당시 원고와 피고 모두 미성년자였고, 화폐가치가 그간 달라진 점 등을 들어 청구액의 40%인 2000만원으로 정했다.
심지연 법무법인 심앤이 대표변호사는 "우리 사회에 수없이 축적돼 있는 미성년 친족 성폭력을 소멸시효 예외를 통해 인정한 기념비적 판결"이라며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성폭력 사건서 진단일 기준 판례 잇따라최근 이처럼 성폭력 피해로 인한 정신질환이 뒤늦게 발현된 경우 전문가의 진단을 통해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판례들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은 앞서 2021년 초등학생 시절 테니스 코치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전직 선수에게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피해자는 성인이 된 뒤 가해자와 우연히 마주친 날부터 악몽과 두통에 시달렸고 약 2개월 뒤 PTSD 진단을 받았다. 피해자는 2019년 첫 체육계 미투에 나선 김은희 전 국민의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가해자는 마지막 범행으로부터 10년이 지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범죄 당시에는 장래 정신질환이 어느 정도로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범행일이나 일부 증상이 나타난 때가 아니라 전문가로부터 PTSD 진단을 받아 손해가 객관적으로 현실화된 때부터 시효가 진행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특히 피해자가 범행 당시 아동이었거나 가해자와 친족·보호 관계에 있었던 경우 피해를 인식하고 표현하거나 법적 구제에 나서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봤다. 성범죄 직후를 일률적으로 시효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당시에는 장래 손해가 불확실해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고, 실제 정신질환이 나타난 뒤에는 이미 시효가 끝나는 부당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취지다.
창원지법도 2023년 6월 비슷한 법리를 적용해 피해자에게 4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 피해자는 미성년자이던 2015년, 재혼한 어머니의 배우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가해자는 이후 자신의 자녀이자 피해자의 이복동생을 만나겠다며 피해자의 주거지를 찾아왔고, 피해자와 여러 차례 마주쳤다. 이후 피해자는 사소한 소리에도 놀라고 극심한 불안을 호소했다. 피해자는 2022년 1월 27일 처음 정신과 진료를 받고 PTSD, 우울 증상을 진단받았다.
창원지법은 당시 판결문에서 가해행위와 현실적인 손해 발생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는 불법행위의 경우 소멸시효의 출발점은 단순히 범행이 있었던 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잠재적으로만 존재하던 손해가 이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결과로 나타난 때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총/김유진 기자 young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