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 약하기 때문에 한국 원화도 약해지고 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엔화 약세가 원화를 비롯한 아시아 통화 전반의 약세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28년 만에 일본과 함께 엔화 매수 개입에 나선 것도 급격한 엔저가 아시아 외환시장 전체를 흔드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베선트 장관은 4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아시아 통화가 엔화와 연동돼 있다”며 “엔화가 약하기 때문에 한국 원화도 약해지고 있고, 중국도 위안화 절상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통화 가치 하락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 통화의 동반 약세를 촉발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일본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엔저로 높아지면 한국과 중국도 수출 경쟁력 유지를 위해 자국 통화 강세를 용인하기 어려워진다. 시장 참가자들이 아시아 통화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고 매도하는 움직임도 강해질 수 있다.
베선트 장관은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를 사례로 들었다. 그는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는 큰 폭의 엔저가 촉발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 엔화 가치가 1년 사이 달러당 약 30엔 하락하면서 태국과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됐고, 통화 위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이 지난달 30일부터 일본과 공동으로 엔화 매수 개입에 나선 데도 이 같은 위기의식이 반영됐다. 엔화 매도세를 방치하면 원화와 위안화 등으로 매도 압력이 확산하고, 아시아 전체가 경쟁적인 통화 절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베선트 장관은 장기간 이어진 일본의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에도 사실상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아베 정권 이후의 경제정책에 대해 “리플레이션과 기업개혁을 통해 자본수익률을 높이고 경제 기반을 강화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아베노믹스의 단계는 끝났고 이제는 다카이치노믹스의 시기”라고 강조했다.
15년간의 경기부양으로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탈출 기반이 마련된 만큼, 이제는 초저금리와 대규모 금융완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장기적인 저금리 정책은 엔저를 심화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베선트 장관은 일본은행에 직접 금리 인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와는 15년째 알고 지내고 있으며, 시장 감각이 매우 뛰어나 깊이 신뢰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일본은행의 조기 금리 인상에 대한 우회적인 지지로 해석하고 있다.
미국 정부 내부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의 감세 노선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식료품 소비세율을 현행 8%에서 1%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고물가로 위축된 소비를 살리기 위한 조치지만, 대규모 감세가 재정 불안을 키워 장기금리 상승과 추가 엔저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일 공동개입의 세부 내용을 아는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다카이치 정권에는 감세를 받아들일 것인지,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며 “나라면 후자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은 에너지 등을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엔저가 인플레이션을 가속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세 감세로 물가를 일시적으로 낮추더라도 재정 악화 우려로 엔화가 다시 하락하면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감세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은 향후 추가 공동개입 가능성도 열어뒀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달러 매도 개입을 포함해 모든 선택지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번 개입에서 달러가 아니라 유로화를 팔고 엔화를 산 것은 미국의 강달러 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미무라 아쓰시 재무관은 이번 개입을 “미·일 통화동맹의 최종 형태”라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는 주요 7개국 가운데 다른 국가들도 엔화 매수 개입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일본과 공동개입에 나선 배경에는 엔저가 한국 원화와 중국 위안화를 비롯한 아시아 통화 전체의 약세를 부추길 수 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금융·재정정책이 바뀌지 않는다면 외환시장 개입만으로는 엔저와 아시아 통화 약세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