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 기업을 살리는 자본 재배치 전략 [삼일 이슈 프리즘]

입력 2026-08-04 21:19
이 기사는 08월 04일 21:19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코스피 지수와 수출 실적 등 거시경제 지표가 뚜렷한 개선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매출과 이익 모두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국내 기업들이 당면한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전년 대비 2026년 총 수출 증가율은 30.3%로 전망되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7.2%, 반도체와 정보기술(IT)을 모두 제외하면 1.7%로 크게 낮아진다. 한국은행 통계 역시 2025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1%를 기록한 가운데, 반도체 등 정보통신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의 성장률은 0.4%에 불과했다. 이처럼 최근의 경기 회복은 일부 산업에 집중되어 있고, 대다수 산업은 여전히 저성장 국면에 머물러 있다.

이런 환경에서 많은 기업들이 고민에 빠져 있다. 성장성이 고갈된 사업에 관성적으로 자본을 투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제한된 자원을 기존 핵심사업 강화와 미래 성장동력 확보 중 어디에 먼저 배분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결국 이 모든 고민은 ‘보유한 자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며, 이 선택이 기업 생존을 좌우한다. 이는 저성장 시대 기업의 재무 전략을 책임지는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다. 경영과 투자를 관통하는 자본 배분의 기준 최근 재무 전략과 관련된 논의에서 주목할 만한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 불확실한 산업 환경에서 CFO는 단순한 비용 관리자를 넘어, 미래 성장을 위한 자원 배분을 설계하는 ‘재무 설계자(Financial Architect)’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한된 자원으로 현재 사업의 수익성을 지키면서 미래 투자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CFO는 경제적부가가치(EVA)와 투하자본이익률(ROIC)을 주요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ROIC가 가중평균자본비용(WACC)을 상회하도록 관리하고, 모든 사업에 동일한 수익성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사업별 전략적 기회비용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기업마다 재무구조, 사업 성숙도, 경쟁지위, 주주의 기대 등 고려할 요소가 다르지만, CFO의 역할이 단순한 예산·비용 관리를 넘어 자본 배분의 방향을 설계하는 데 있으며, 그 판단 기준을 ROIC와 WACC에 둬야 한다는 관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흥미로운 점은 ‘제한된 자금’으로 ‘정해진 기간 내’에 성과를 내야 하는 사모투자펀드(PEF)도 비슷한 원칙으로 투자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PEF는 투자 혹은 인수를 위해 자금을 모집해 블라인드 펀드를 만드는데, 보통 모집 자금의 최대 약 20~25%를 한 개의 대상에 투자할 수 있다. 즉, 설정된 펀드당 4~5개의 기업에 분산 투자해야 하며 한정된 자금을 어떻게 배분해 수익을 극대화할 지가 관건이다.

PEF가 투자 대상을 처음 검토할 때는 정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매출 추세와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을 기준으로 기업가치를 가늠한다. 하지만 최종 의사결정 단계에서는 외형 성장이나 회계상 이익만 보지 않는다. 운전자본 부담, 지속적인 자본적지출(CAPEX) 필요성, 고객·공급망 집중도, 투입한 자본의 회수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 최종 결론은 예상 내부수익률(IRR)과 투자원금회수배수(MOIC)로 나타난다. 예컨대 현재 매출과 이익률이 양호하더라도, 시장이 구조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계속 추가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라면 목표한 IRR·MOIC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불확실한 미래, '단계적 투자'의 중요성사업계획을 세우고 검토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먼 미래의 장밋빛 현금흐름'으로 현재의 투자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이다. 팀 콜러(Tim Koller) 등이 저술한 재무학의 고전 <밸류에이션(Valuation)>은 기업가치가 미래 현금흐름, 투하자본이익률, 자본비용의 유기적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마이클 모부신(Michael J. Mauboussin)의 <자본 배분(Capital Allocation)> 역시 모든 자본 사용에는 기회비용이 따르며, 장기적으로 자본비용을 넘는 수익을 낼 수 있는지가 가치창출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시간의 가치는 할인율에 반영되지만, 사업의 성공 여부와 현금흐름의 실제 발생 여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불확실성이라는 것이다. 미래 현금흐름이 아무리 커 보여도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경기, 기술, 규제, 경쟁 구도, 고객 수요, 자금조달 여건 등 수많은 변수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큰 장기 신사업이나 기술 투자는 시장 검증, 기술 확보, 양산 전환 등 핵심 이정표의 달성 여부에 따라 자본을 순차적으로 집행하는 '단계적 투자(Staged Investing)'가 유효하다. 이를 위해서는 거래 상대방과 협의해 유연한 계약 구조를 미리 마련하고, 투자금 전액을 한 번에 승인하기보다 이정표 별로 순차 배분하는 원칙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의 낙관적 시나리오에만 의존하지 말고, 기준·상방·하방 시나리오별 발생 확률을 반영해 현금흐름을 검토하며, 주요 전제와 변곡점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는 손실 위험을 제한하면서도 성장 기회를 유지하는 전략적 안전장치다. 자본 회수는 축소가 아닌, 자본 재배치의 출발점저성장기에는 신규 투자만큼이나 기존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자본을 회수해 더 생산적인 영역으로 재배분하는 판단이 중요하다. 최근 SK그룹이 추진해 온 사업 리밸런싱이 대표 사례다. SK는 지난해 3월 SK스페셜티 지분 85%를 약 2조7000억 원에 매각했고, SK렌터카와 일부 투자지분도 정리했다. SK그룹은 이를 통해 재무건전성을 높이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동시에 SKC의 인공지능(AI) 반도체용 글라스기판,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소재 등 전략 분야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두산그룹도 자산 매각과 사업 재편으로 자본을 회수해 새 성장 분야에 재배분한 사례다. 2020년 유동성 위기 이후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솔루스, 두산타워 및 모트롤사업부 등을 차례로 매각했고, 확보한 자금은 우선 차입금 축소와 유동성 정상화에 활용됐다. 재무구조 개선을 바탕으로 두산그룹은 2022년 2월 채권단 관리 체제를 조기 졸업했다. 이후 반도체 테스트 기업 테스나를 약 4600억 원에 인수하고, 반도체·로봇·수소·원전 및 소형모듈원전(SMR) 등을 중심으로 그룹의 성장축을 재편해 왔다.

글로벌 기업 중에는 필립스의 사업 전환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면도기·TV·조명 등 소비재와 전통 제조업의 대명사였던 필립스는 관련 시장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둔화되자 사업 포트폴리오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오랜 기간 주요 수익원이었던 조명사업을 분사하고 가전사업을 매각하는 한편, 의료기기와 디지털 헬스케어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관련 기업 인수와 투자를 이어가며 자기공명영상장치(MRI)와 초음파 진단장비 등을 중심으로 한 헬스케어 솔루션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단순히 부진한 사업을 정리한 것을 넘어, 회수한 자본을 성장성과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로 재배분해 기업의 장기 가치창출 구조 자체를 바꾼 사례로 평가받는다.

[국내외 기업 사업재편 및 자본 재배치 사례]
이들 사례가 주는 핵심 교훈은 자산 매각과 재무구조 개선을 통해 ‘새로운 투자를 검토할 수 있는 선택권 자체를 회복했다’는 것이다. 실제 자문 현장에서 본 비핵심 사업 매각의 효과도 매각대금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남은 사업의 전략적 집중도가 높아지고 차입 부담과 경영진의 관리 범위가 줄어들며, 향후 자금조달 여력까지 함께 개선될 때 비로소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이 지속적인 가치창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자본 배분 과정의 핵심 체크리스트자본 배분의 정답은 기업마다 다르지만, 자문 과정에서 유용했던 질문은 비교적 일관적이었다. 현재 성과 가운데 특정 제품과 고객, 산업 사이클에 의존하는 부분은 얼마나 되는가. 회계상 이익이 실제 영업 현금흐름으로 전환되기까지 어떤 운전자본과 유지보수 투자가 필요한가. 비핵심 사업을 계속 보유할 때의 기회비용은 무엇인가. 장기 투자에서 현금흐름 발생을 좌우하는 핵심 이정표는 무엇이며, 실패할 경우 추가 손실을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사업계획의 전제가 달라졌을 때 자본 배분을 중단하거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는가.
저성장 시대에는 재무 판단이 더욱 중요해진다. 기업가치 제고는 매각이나 투자와 같은 개별 거래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비핵심 자산에서 자본을 회수해 재무 안정성과 핵심사업을 보강하고, 미래현금흐름의 발생 가능성을 검증하며 단계적으로 투자하는 일련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공식을 따르는 게 아니다. 기업의 선택과 집중을 숫자와 현금흐름의 언어로 설계하고, 그 전제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일, 이것이 저성장 시대를 헤쳐 나가는 기업과 CFO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