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머니' 채권으로…하이닉스, 15조 폭풍 매수

입력 2026-08-04 17:45
수정 2026-08-05 00:22
SK하이닉스의 ‘반도체 머니’가 채권시장으로 대거 유입되고 있다. 이 회사는 올해 초까지 공기업과 시중은행이 발행하는 1년 만기 채권에만 자금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최근엔 카드회사, 증권회사가 발행하는 3년 만기 회사채 등으로 투자 범위를 넓혔다. 증권가에선 SK하이닉스가 채권시장 큰손으로 부상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NH투자증권이 지난달 28일 발행한 회사채 5000억원어치 중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 지난 3일엔 1조2600억원 규모로 발행된 미래에셋증권 기업어음(CP)을 모두 쓸어갔다. 지난달 16일에는 우리카드의 3200억원 규모 CP를 전량 사들였다. 최근 한 달여간 SK하이닉스가 사들인 채권만 15조원어치에 달한다는 게 증권업계 설명이다.

자본시장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이달 발행되는 회사채에도 대규모 자금을 집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채권 발행 계획이 있는 증권사들이 SK하이닉스만 쳐다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채권 운용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본다. 이 회사는 올해 초까지 1년 만기 은행채와 특수채만 찾았다. 신용등급이 AAA급인 데다 만기도 짧아 원금 손실 위험이 거의 없는 채권이다. 하지만 최근엔 신용등급 AA급인 카드사와 증권사의 3년 만기 채권 등 ‘중위험 중수익’ 채권 상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올해 2분기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이 88조원 안팎으로 늘어나자 SK하이닉스가 투자의 방점을 안정성에서 수익성으로 옮겼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시설 투자 등을 위해 급하게 현금화해야 할 자금을 빼놓고도 중금리 채권에 투자할 여력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88조 현금부자 하이닉스, 채권 큰손 부상
'만기 3년' 제한 두고 투자…"단기·중기물 버팀목 역할"SK하이닉스가 채권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건 ‘지갑’이 두툼해져서다. 이 회사의 2분기 현금성 자산은 87조9580억원으로 전 분기(54조3300억원)보다 61.9%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16조9620억원)과 비교하면 다섯 배 넘게 증가했다.


국내 비금융기업 중 SK하이닉스보다 현금성 자산이 많은 곳은 삼성전자뿐이다. 삼성전자의 2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189조9990억원으로 전 분기(147조3781억원) 대비 42조6209억원(28.9%) 늘었다. 삼성전자도 은행 예금과 채권 등에 나눠 자산을 운용한다. 증권업계에서는 반도체 기업 유입을 반기고 있다. 이들이 증권채와 카드채, 기업어음(CP) 등을 사들인 덕에 발행사가 필요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돼서다.

투자 방식이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과거 SK하이닉스는 증권사에 채권 운용을 일임했다. 발행사와 주관사가 회사채 발행을 앞두고 물량 및 조건을 전달하면 SK하이닉스와 거래하는 증권사가 자체 심사를 거처 투자 여부, 물량 등을 결정했다. 최근엔 상황이 달라졌다. SK하이닉스가 사들일 의사가 있는지 먼저 확인한 뒤 채권 발행 물량, 조건 등을 결정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SK하이닉스가 정한 투자 기준선은 ‘만기 3년’이다. 이보다 만기가 긴 채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규모 시설 투자에 수시로 나서야 하는 반도체 기업 특성상 만기가 5년이 넘는 상품에 자금을 묶어둘 수 없어서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자금이 단기·중기물 시장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만 장기물로는 수요가 확산하지 않고 있다”며 “단기물과 장기물 간 수급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현금성 자산을 더 적극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지난달 28일 SK하이닉스 재무팀은 국공채와 특수채, 회사채, CP, 전자단기사채 등을 직접 운용하거나 이를 위탁해 운용하는 금융회사를 관리하는 직원을 채용한다는 내용의 공고를 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일시적으로 여유 자금을 집행하는 수준을 넘어 상시적인 채권 운용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은행과 보험사, 자산운용사에 이어 채권시장의 독립적인 매수 기관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