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지속가능한 국가 재정의 조건

입력 2026-08-04 17:43
수정 2026-08-05 00:29
반도체와 수출 호황에 힘입어 세수 전망이 크게 개선되면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민생 지원에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미래 산업 투자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국가채무를 줄이는 데 우선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다. 아쉬운 점은 논의가 엄밀한 전망과 경제학적 분석보다 진영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재정정책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어디에 쓸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늘어난 세수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이다.

반도체 호황이 한국 경제에 큰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에 있고,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대체하기 어려운 전략산업이라는 말이 곧 대체 불가능한 독점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도체는 전략자산인 동시에 글로벌 수요, 경쟁 구도, 기술 변화에 따라 가격과 업황이 크게 흔들리는 산업이다. 최근 주식시장의 급락과 반도체 기업 주가의 큰 변동성은 이런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반도체 기업의 영업이익이 법인세를 통해 국가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제 반도체 이익 전망은 단순한 기업 분석의 문제가 아니다. 세수 전망, 재정지출 계획, 국가채무 경로를 좌우하는 공공정책의 핵심 변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낙관적 구호도, 비관적 경고도 아니라 과거의 공급계약으로 인해 예상되는 이익과 그 이후 불확실한 이익을 구분하는 일이다. 단기 공급계약으로 일정 기간의 영업이익은 어느 정도 가시화될 수 있지만, 치열한 경쟁과 급변하는 국제질서 아래에서 그 이후의 업황과 이익 그리고 세수까지 확정된 것처럼 말하기는 어렵다.

국민연금 논의도 비슷하다. 상반기 높은 운용수익률에 고무돼 개혁의 필요성을 낮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하반기 시장 급락은 금융시장 수익률이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물론 장기 투자자인 국민연금이 단기 등락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한두 해의 높은 수익률을 근거로 구조개혁을 미뤄서도 안 된다. 연금의 지속 가능성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인구구조, 보험료율, 급여 수준, 장기 기대수익률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재정지출은 한번 늘어나면 되돌리기 어렵다. 이번 정부가 호황기에 만든 지출 약속은 다음 정부의 예산과 국가채무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초과 세수의 활용은 이번 정부 임기 내 세입·세출만 보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다음 정부의 세수 경로와 지출 부담, 고령화에 따른 연금·복지 비용, 경기 하강 시 재정 여력까지 함께 놓고 장기 시계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반도체 호황과 수출 증가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끌어올리고, 이는 단기적으로 정부채무비율을 낮추기 때문에 증세나 지출 삭감 없이도 재정지표가 개선될 수 있다. 이는 한국 경제에 주어진 중요한 완충 장치라는 점에서 우리의 재정 여력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볼 이유도 없다.

필요한 것은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반도체 호황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이를 영구적 재정 여력으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재정 논의의 출발점은 “무엇을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속 가능한 재원으로 볼 수 있는가”여야 한다. 좋은 시절에 만들어진 잘못된 약속은 나쁜 시절에 가장 큰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 호황과 구조적 변화를 구분할 수 있는 엄밀한 경제학적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