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기 싫었던 게으른 첫째 돼지가 짚으로 집을 지었다가 늑대의 먹잇감이 된다. 나무로 집을 지은 둘째 돼지의 운명도 마찬가지. 반면 똑똑한 셋째 돼지는 늑대의 강한 입김에도 끄떡없는 벽돌집을 지어 위기에서 벗어나고, 늑대는 굴뚝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는 이처럼 권선징악의 구도가 명확한 이야기다.
신예 작곡가로 주목받는 이하느리(20)가 이 동화의 익숙한 주제의식을 뒤집는 시도에 나선다. 오는 15~17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리는 음악극 '그렇게 바람이 불었고, 나는 두 형을 먹었다'를 통해서다. 제목은 첫째·둘째 돼지를 잡아먹은 늑대를 셋째 돼지가 결국 먹어버리는 원작의 내용에서 따왔다.
이하느리는 4일 서면 인터뷰에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망가뜨려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며 "가장 익숙한 이야기 중 하나인 '아기돼지 삼형제'의 틀을 빌리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 보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전했다.
'천재 작곡가'로 주목받는 이하느리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바르토크 국제 콩쿠르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클래식 음악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예원학교 2년 선배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이하느리에 대해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 한 명"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첫 상주 작곡가로 영역을 넓혀온 이하느리는 이번에 음악과 퍼포먼스 등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극에 도전한다.
작품은 '늑대'의 존재 자체가 아닌 '늑대를 믿는 심리'에 주목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의심 없이 믿게 되는 상태, 즉 '맹신'에 관한 이야기예요.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 의해 더 쉽게 움직이기도 하잖아요. 두려움, 소문, 신념처럼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고 때로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을 갖죠. 이런 믿음의 구조를 '늑대'라는 상징을 통해 바라보고 싶었어요."
작품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반복'이다. 돼지 형제의 공포가 전염되듯, 퍼포머의 신체 움직임과 음악도 되풀이되며 변형된다. 이하느리는 "작품 속에서 음악과 언어, 몸짓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조금씩 변형되고, 결국 처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억과 사고가 어떻게 왜곡되고, 하나의 망상이 현실을 대체하게 되는지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하느리는 이러한 반복적 연출이 '틱 장애'를 연상시키는 등 일부 관객에게 불편감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불편함 역시 작품이 전달하려는 감각의 일부라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그 감정을 피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연출 메모처럼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아야 할 정보가 무대 일부로 활용된다는 점도 이번 공연의 특징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비트는 것을 넘어 공연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 셈이다.
이하느리는 "무대 위에 보이는 것만이 공연인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과정 역시 공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며 "그래서 음악뿐 아니라 영상, 설치, 퍼포먼스, 작업 메모와 연출 지시까지 모두 하나의 공연 재료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하느리는 앞으로도 다양한 음악적 실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리뿐 아니라 시각적인 요소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됐어요. 특히 극 자체를 더 깊이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앞으로는 음악과 다른 예술 매체가 만나는 작업을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