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과 기업 경영진을 직접 연결하는 전례 없는 모금 체계를 통해 취임 후 8억달러 이상을 끌어모았다. 기업의 거액 기부와 대통령 접근권, 규제 결정이 맞물리면서 미국 정치와 시장의 권력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평가다.
30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거의 매일 모금책 메러디스 오루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기업과 후원자가 얼마를 냈는지 확인하고 추가 모금을 지시한다. 예정했던 금액보다 훨씬 큰 금액을 요구하거나 최근 자신을 만난 인사의 이름을 직접 전달하기도 한다. 오루크는 기업에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거나 “보스가 이 돈을 원한다”고 말해왔고, 트럼프 대통령은 후원자를 집요하게 설득하는 그를 ‘어둠의 공주’라고 불렀다.
소프트뱅크는 트럼프 대통령도서관에 5000만달러를 냈다. 애플은 백악관 무도회장 건립에 약 2500만달러, 마이크로소프트는 약 1000만달러, 아마존은 약 500만달러를 기부했다. 메타플랫폼은 무도회장 기부금과 대통령도서관에 지급한 2200만달러 외에 친트럼프 정치단체 ‘시큐어링 아메리칸 그레이트니스’에도 1000만달러를 냈다. 이 단체의 후원자는 슈퍼팩과 달리 공개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도회장과 대통령도서관, 미국 건국 250주년 사업 ‘프리덤 250’, 정치위원회와 슈퍼팩 등 다양한 사업에 기업당 2500만∼5000만달러를 요구해왔다. 비영리단체나 슈퍼팩, 이슈단체를 위한 무제한 모금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으며 상당수 거래는 후원자 공개 의무와 정기적인 지출 보고도 없다. 그는 무도회장 후원자 만찬에서 남는 돈을 개선문 등 다른 사업에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셰브런은 5000만달러를 요구받았지만 이보다 적은 수백만달러를 냈다. 메타 경영진들은 취임식과 무도회장, 부활절 행사 등 반복되는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내부 회의를 열었다. 일부 후원자는 수백만 달러를 낸 뒤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감사 인사 대신 추가 기부 요청을 받았다. 한 기업 임원은 무도회장에 거액을 내고 감사 만찬에 참석한 지 며칠 뒤 다른 트럼프 관련 단체에 100만달러를 더 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라이스대 대통령사 연구자 더글러스 브링클리는 "기업을 상대로 한 모금 규모가 기존의 모든 관행을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가 정치 후원자에게 백악관 링컨 침실 숙박을 제공했다는 논란과 비교해도 이번에는 돈이 흐르는 범위와 규모가 전혀 다르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정치활동위원회를 사기라고 비판하고 자신이 선거비용을 부담해 후원자와 이익집단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첫 임기에도 기업에 적극적으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4년 대선 과정에서 석유기업 경영진들에게 10억달러를 요구하고 500만달러 이하로는 점심을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태도가 바뀌었다.
오루크는 2016년과 2020년 선거운동을 거쳐 2024년 전체 모금을 이끌었다. 선거 후 기업과 후원자가 마러라고에 줄을 서서 수백만 달러 수표를 내는 모습을 본 트럼프 대통령은 모금 축소를 준비하던 그에게 즉시 추가 기부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공무원이 아니지만 백악관과 에어포스원에 동행하고 기업 경영진이 규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도 참석한다. 트럼프미디어앤드테크놀로지 이사와 프리덤 250 모금에 관여한 국립공원재단 이사도 맡았다.
규제 결정과 모금의 연관성도 논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주피터 골프장에서 담배회사 경영진을 만나 전자담배와 식품의약국 정책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고, 정치위원회에 수백만 달러를 모았다. 이후 식품의약국은 일부 향 첨가 전자담배 규제를 완화했고 기관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백악관은 해당 정책이 성인의 금연을 도울 수 있다는 연구에 따른 과학적 결정이라고 반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전쟁을 시작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플로리다에서 1인당 100만달러 모금행사에도 참석했다. 행사 도중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사망 소식을 보고받은 뒤에도 기업 현안을 들었으며 버라이즌 최고경영자와 케이블 종류를 놓고 긴 대화를 나눴다. 기업 관계자들에게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은 뒤 로비스트에게 기부 규모를 제시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록히드마틴은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까지 건국 250주년과 워싱턴 기반시설 사업에 1000만달러 이상을 냈다. 미 국방부는 지난 6월 이란전쟁으로 줄어든 미사일을 보충하기 위해 록히드마틴에 최대 350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부여했고, 회사는 이후 백악관 헬기 착륙장 건설에 약 500만달러를 내기로 했다. 회사 측은 "모든 정부 협력이 법과 규정을 준수하며 워싱턴과 전국의 기반시설 사업을 오래 지원해왔다"고 밝혔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