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6월 29일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는 대한민국 산업지도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그중에서도 호남권에 800조원을 투입해 삼성전자 2기, SK하이닉스 2기 등 팹 4기를 짓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은 국가 균형발전과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동시에 겨냥한 야심 찬 승부수다. 이 프로젝트의 성패는 결국 전력에 달려 있다. 팹 4기를 가동하려면 6.3GW의 전력이 필요하다. 이는 대형 원전 5기에 육박하는 규모로, 지난해 호남권 전체 전력 수요(5GW)보다도 크다.
더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반도체 공정은 주파수를 59.98~60.02㎐ 범위에서 정밀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순간의 정전만으로도 웨이퍼 수천 장이 폐기되고 라인 전체가 멈춘다. 24시간 무중단·고품질 전력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 물리적 전제조건이다. 반도체업계에서는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투입해 공정을 거쳐 완성된 칩 모양으로 나올 때까지의 소요시간을 ‘TAT(turn around time)’라고 한다.
업계에서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TAT를 통상 4개월로 본다. 거의 4개월 동안 정전은 말할 것도 없고, 주파수가 100분의 1초라도 흔들리면 모든 것을 날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호남에 태양광이 풍부하니 반도체 팹의 재생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기준 호남 발전설비는 23.3GW로 지역 수요 5GW의 4.6배에 달하고, 전국 태양광 32GW 중 11GW가 호남에 몰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그대로 반도체 팹의 안정성과 등치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태양광의 평균 이용시간은 하루 3.5시간으로, 24시간 6.3GW를 충당하려면 설비를 여섯 배 이상 늘리고 12시간 이상의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에만 수십조원이 든다. 게다가 장마가 1주일 이상 이어지는 상황까지 대비하려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예비력을 위해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발전소가 필요하다. RE100 요구 조건도 회계적 이행 수단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최적 포트폴리오는 원전 55%(약 3.5GW), LNG 발전 24%(1.5GW), 재생에너지 21%(1.3GW+ESS) 구성이다. 원전은 기저부하 24시간 안정성을 확보하고 LNG는 첨두·백업, 재생에너지는 RE100 이행과 탄소 감축 목표를 담당하는 삼각 구도다. 이때 관건은 영광 한빛원전이다. 한빛 1호기는 설계수명이 다해 지난해 말 가동을 멈췄고, 2호기도 오는 9월이면 정지한다. 3~6호기 역시 2034년부터 차례로 만료된다.
발전설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송전망이다. 전력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호남권 345㎸ 송전망 13곳 중 12곳이 2026~2030년 ‘수용 부족’ 상태다. 2031년 이후에는 13곳 전부가 포화된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반도체 팹까지 흘려보낼 ‘고속도로’가 없는 셈이다. 송전선로 하나 짓는 데 5~7년이 걸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장 큰 병목이 될 수 있다.
정부는 2029년 말 팹 부분 가동을 공언했다. 그러나 원전 계속운전 및 신규 건설 공론화, 5년 이내 원전 인허가, LNG 열병합발전소 건설, 345㎸ 송전망 신설, ESS·동기조상기 등 계통 안정화 설비가 충족되지 않는 한 이 일정은 물거품이 될 위험이 크다. 800조원 투자, 팹 4기, 6.3GW라는 실체는 정치적 의지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원전·재생에너지·LNG를 균형 있게 배치하고, 송전망 병목을 조기에 해소하며,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사회간접자본(SOC) 부서로서 인프라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로드맵이며,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