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가 재미없다고? 이 '원형 극장'에선 발 묶인다

입력 2026-08-07 08:55
수정 2026-08-07 09:12


미술 전시를 봐도 미디어아트 작품은 대충 보고 지나친다는 사람이 많다. 손맛으로는 회화나 조각에 못 미치고, 재미로는 유튜브 영상에, 시각적 스펙터클로는 헐리우드 영화에 못 미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나와있는 함양아(58) 작가의 미디어아트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2층 전시장 한가운데 세워진 거대한 원형 구조물 안으로 들어서면 둥근 화면이 사방에서 관객을 에워싸며 압도한다. 22분 동안 화면에서는 장례와 탄생, 냉전의 종식, 세계화, 금융위기, 팬데믹, 인공지능(AI)에 관련한 내용이 차례로 흘러나온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주제는 서로 얽히고설킨다.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짜임새 덕분에 관객은 현대사(史)의 복잡한 흐름을 온몸으로 살아낸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림, 조각, 영화 등 다른 어떤 장르로도 전달할 수 없는 미디어아트만의 매력이다.




함양아는 서울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오가며 활동하는 영상 설치 작가다. 국내 전시가 많지 않았던 탓에 대중에게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프랑스 팔레 드 도쿄와 독일 ZKM 미술관처럼 굵직한 해외 미술관에 잇달아 초청되는 등 국제적인 명성은 확고하다. 이번 개인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는 2010년 이후 16년 만에 아트선재센터에서 여는 전시다. 작가가 지난 8년간 만든 영상 설치 작업이 전시장 세 개 층을 채웠다.

작가의 작품 철학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비춘다'는 것이다. 그의 영상에 수많은 인물이 나오는 것도, 작품 규모가 유달리 큰 것도 이런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끼는 각양각색의 고통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다”며 “수없이 많은 사회적 원인이 만나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돼 또 다른 결과를 만드는 관계망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금융·정치·기술·교육·노동 등 현대 사회 각 영역에서 자료를 모으고 분류해 영상으로 쌓아 올린 이유다.



3층 전시장에 나온 신작 '듣는 화자, 말하는 타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찍은 5~15분짜리 무편집 독백을 여러 대의 모니터에 펼쳐 놓은 작업이다. 지구촌 사람들의 사적인 고민이 흘러나와 듣는 재미가 있다. 함 작가는 “지식은 위키피디아에 저장되지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뭘 느끼는지를 기록하는 곳은 없다”며 “사람들의 감정을 기록한 '감정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1층에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영상 '사람은 무엇을 배우나'는 어린이와 부모 등을 인터뷰해 '배움'과 '돌봄'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다.

현대사를 통째로 아우르는 주제인 만큼 작업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함 작가는 “거대한 서사에 압도돼 한동안 초조해했고 병까지 앓았다”며 “그러다 내 몸에 신경을 집중하게 됐고, 개인의 몸과 일상을 작품에 담으면서 결과적으로 더 넓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관람료 성인 1만원, 전시는 10월 4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