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감일지구에는 4만 명이 삽니다. 1만 명은 아이들입니다. 7500명은 가임기 여성입니다. 매일 하루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묻습니다. 왜 감일입니까?"
감일 주민 반미옥 씨는 주민 80여 명과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동서울변전소·변환소 주민 공청회'에 참석했다. 반 씨는 "반도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변전소 증설 과정에서 아이들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주민들이 "사업 백지화, 전면 이전"을 외치자 공청회를 주최한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국전력·기후에너지환경부 관계자들 표정은 무겁게 굳어갔다. 이날 이 의원이 웃은 것은 처음 주민들과 악수할 때,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어 고맙다는 주민 인사를 받았을 때 단 두 번이었다. 감일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국감 숙제' 동서울변전소 다시 '시끌'민주당 지역구인 하남갑에는 해묵은 현안이 있다. 과거 이곳을 지역구로 가졌던 추미애 경기지사도 골머리를 앓았던 주제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던 추 지사는 이 현안을 해결하려 타 상임위 소관인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까지 증인으로 불렀다. '사적 감사' 논란까지 감수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부터 지금까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숙제는 최근 6·3 재·보궐선거로 원내 입성한 이 의원이 떠안은 상태다.
현안 핵심은 혐오 시설 증설에 대한 주민 반발로 요약된다. 경기 하납갑의 동서울변전소는 동해안에서 만든 전기를 수도권에 공급하는 주요 설비다. 한국전력은 증가한 수도권 전력 수요에 맞춰 이곳의 초고압직류송전(HVDC) 설비 증설을 추진 중인데, 6년째 진도가 나가고 있지 않다. 소음과 전자파 문제를 우려한 주민들은 계속 전면 계획 철회를 주장하면서다. 최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부족이 문제시되고,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인 '에너지 고속도로'의 인허가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사업 속도를 높이려는 한전과 주민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이날 공청회에는 역학조사 전문가 이무송 울산대 의대 교수, 소음 분야의 김영일 서울과학기술대 건축학부 교수, 전자파 전문가 김지훈 고려사이버대 전기공학 교수 등이 전문가로 참석했지만 이들 말은 번번이 끊기기 일쑤였다. "시뮬레이션 결과 주민에게 큰 피해가 없다"는 말이 나올 때면 주민들이 "한전 편 아니냐"며 분노하고, 패널들이 말을 줄이는 패턴이 반복했다. 발언에 나선 대다수 주민은 "처음부터 증설 결정에 주민 참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무효"라는 주장을 폈다. 애초 공청회를 통한 의견 합일은 요원했던 셈이다.확장하는 전력 설비…AI 시대의 그늘동서울발전소의 증설이 결정된 배경은 기본적으로 한전이 마땅한 부지를 찾지 못해서다. 새로운 송전망 설치, 용지 매입, 주민 보상 등을 고려하면 기존 발전소의 설비를 늘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기 이천, 여주 등 다른 부지도 고려했지만 그곳의 지역 주민들 반발 역시 거셌다. 하지만 감일지구 주민들은 증설 부지와 가장 가까운 아파트 사이 거리가 150m에 불과한 점을 사례로 들며 감일 역시 적합한 곳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래 1979년 동서울발전소가 들어설 당시엔 주택지구가 없었지만, 정부가 이곳을 공공주택지구 지정하고 신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며 발전소와 아파트 사이 거리는 줄어왔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전력 및 부대 설비 수요가 크게 늘면서 이 같은 갈등 사례는 늘어날 전망이다. 앞서 경기 용인시 죽전동 주민들의 죽전데이터센터 건립 반대 운동, 호남권 한빛 1·2호기 수명 연장 관련 주민 반발, 서울 독산동 주민들의 데이터센터 공사 항의시위 등도 감일지구와 비슷한 형태의 갈등이 빚어졌다. 대체로 수도권에 지어야 효율적인 설비고, 주민들은 전자파·소음 등을 우려한다는 점에서 구조가 같다. 해당 지역이 여당 지역구일 경우, AX(AI 전환)이란 정부 정책 보조와 주민 갈등 해결을 동시에 이루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다.
전문가들은 보상의 획기적 확대와 공공 설비에 대한 시민 의식 전환이 동시에 성사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1990년대 우리 사회를 흔든 군포 쓰레기소각장 반대 사태 이래로 혐오 시설에 대한 지역민 갈등 사례는 끊임없었다"며 "오히려 현재는 AI 시대를 맞이해 한정된 자원에서 적정 부지를 구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기적으론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재산권 보상 방안이 필요해진 시대임을 정부와 공공기관들이 인정하고, 장기적으론 공공 설비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늘릴 수 있는 시민교육이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의사 결정에 주민이 적극 참여하는 새 거버넌스 확립, 주민 숙원 시설의 동시 설치 등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