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도청은 이전해 놓고, 330만평을 나라에서 국책사업으로 해놓고 옮긴다니. 그게 국가가 시민들을 상대로 기획 부동산 사기를 한 것 아니냐. 국가가 부동산 손실 보장해줄 거냐."</i>
2016년 경북도청이 대구에서 옮겨오며 국책사업으로 조성된 경북도청 신도시. 처음 이곳은 인구 10만명 규모의 북부권 거점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인구는 계획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TK 행정통합 논의까지 본격화하면서 통합 청사가 대구로 갈 수 있다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오자, 도청 하나를 보고 삶의 터전을 옮긴 주민들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 10만 도시를 그렸지만…"인구는 5분의 1"지난 16일 찾은 경북 예천 도청신도시. 중심상가 거리 곳곳에는 '임대 문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7층짜리 상가 건물의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습니다. 한낮에도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도시 설계 당시 상권은 인구 10만명을 전제로 조성됐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가 2만명 초반에 머물면서 공실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부동산 중개인 A씨는 "중심상가 공실 가운데 3분의 1은 10년 동안 분양이나 임대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작년에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그 주변 몇 곳만 채워졌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중심상권 아래쪽에서 점포의 입점과 폐업이 반복되면서 상권이 위쪽으로 확장되지 못했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메인 사거리가 살아나야 유동인구가 인근 상가로 퍼질 수 있지만, 아래쪽 상권조차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위쪽 거리는 사실상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해당 거리에는 '임대 문의' 현수막이 줄지어 있었고, 문을 연 점포보다 빈 점포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청신도시 개발도 사실상 멈춰 섰습니다. 지역민들은 초기 분위기만 놓고 보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합니다. 전남 남악신도시보다 먼저 개발이 시작됐고, 첫 아파트가 들어설 당시만 해도 입주 속도가 빨랐기 때문입니다.
관계자 B씨는 "집권당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보니 대통령 탄핵 국면부터 분위기가 조용해졌고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10년 동안 추가로 지어진 아파트가 없다"며 "도청 신도시는 아직 1단계 개발도 끝나지 않은 상황인데 한 도시를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 산업단지는 텅 비고…"경북까지 내려올 이유 있겠나"
기업 유치가 이뤄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현재 신도시 산업단지는 사실상 비어 있습니다. 산업시설용지 대부분이 주인을 찾지 못한 가운데 KT클라우드 데이터센터만 넓은 공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공장이나 연구시설보다 빈 땅이 훨씬 더 많이 보였습니다.
새로운 기대도 생기고 있습니다. 안동시와 도청신도시 사이 노리 일대에 추진 중인 바이오생명 국가산업단지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산업 기반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지역에서는 산단이 조성되면 기업과 젊은 근로자가 들어와 신도시 상권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옵니다.
다만 산업단지 지정만으로 기업이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상권 관계자 C씨는 "산업단지로 지정됐으면 안동시든 경북이든 직접 기업을 찾아다니며 유치해야 하는 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선거 표밭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며 "결국 누가 발로 뛰어 기업을 데려오느냐의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다시 속도 내는 TK 행정통합이런 상황에서 한동안 북부권 반발 등으로 주춤했던 TK 행정통합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내자 지역민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1일 취임식에서 "대구경북이 인구 500만명, 지역내총생산(GRDP) 200조원 규모의 글로벌 경제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반드시 행정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추경호 대구시장도 지난 9일 국회 예산정책협의회에서 "통합은 생존과 도약을 위한 필수 전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통합 논의에 다시 속도를 내는 데에는 정부가 제시한 인센티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민석 당시 국무총리는 지난 1월 합동브리핑에서 통합 특별시에 연간 최대 5조원, 4년간 최대 20조원 규모의 재정 지원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단체장 직급을 차관급으로 높이고 2027년 예정된 2차 공공기관 이전에서도 통합 특별시를 우선 고려하겠다는 방안도 포함됐습니다.
경북도는 행정통합이 추진되더라도 기존 청사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라는 입장입니다. 경북도 관계자는 "도청 이전을 별도로 검토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주민들은 실제 통합이 이뤄질 경우 행정과 재정의 무게중심이 이미 기반이 갖춰진 대구로 쏠릴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가뜩이나 공무원 수요에 크게 의존하는 도시 구조에서는 도청 기능이 흔들릴 경우 신도시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A씨는 "도청 공무원들이 빠져나가면 이곳은 완전히 소외될 것"이라며 "신도시를 만들며 세웠던 계획도 대부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습니다. ◇ 도청 짓는데 4000억 들여놓고
경북도청 신도시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행정기관에 기대는 도시로 남을지, 기업과 일자리를 갖춘 자족도시로 다시 설계할지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우선 인구 10만명 목표와 개발 규모부터 실제 수요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토연구원도 인구감소·저성장 시대에는 신규 개발을 계속 확대하기보다 기존 도시의 경제 기반과 거점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그런데 도청신도시 산업용지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경북 북부권에는 바이오생명 국가산업단지 등 새로운 개발사업이 잇따라 추진되고 있습니다. 실제 도청신도시 도시첨단산업단지는 올해에도 산업시설용지 20필지가 재공급됐습니다. 새 부지를 계속 벌이기보다 도청신도시 중심부에 산업·상업·주거 기능을 모으고 기업 입주와 상주 인구가 늘어나는 속도에 맞춰 다음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기업 유치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경북도는 2021년 개발계획 변경안에서 도청신도시의 자족기능을 키우기 위해 지식·바이오·백신 분야 핵심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산업 분야만 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용과 협력업체 유입 효과가 큰 앵커기업을 선정해 설비투자 지원과 직원 주택, 시설보조금, 신속한 인허가를 묶은 맞춤형 혜택을 내놓아야 합니다.
한 상권 관계자는 "평당 50만원에 팔겠다던 땅을 준주거지역으로 바꾸면서 10만원에라도 팔아 산업부터 유치하려고 한다는데, 모두 서울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기업들이 경북까지 내려올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땅값만 낮춘다고 기업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러 기업에 혜택을 조금씩 나눠주는 것보다 핵심 기업과 협력업체가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지원을 집중해야 근로자와 상권이 뒤따르고 도청에만 의존해온 도시 구조도 바뀔 수 있습니다.
도청 남쪽에는 '새천년 기념숲'이 있습니다. 웅도 경북의 새로운 천 년을 열겠다는 뜻을 담아 조성한 숲입니다. 그러나 천 년을 내다보고 만든 도시는 불과 10년 만에 존립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경북도청을 짓는 데에는 약 4000억원이 투입됐습니다. 조성 당시에도 막대한 예산을 들인 청사라는 이유로 혈세 낭비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낭비는 비싼 청사를 지은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천억원을 들여 도청을 옮겨놓고, 그 도청이 품어야 할 도시를 비워두는 순간 낭비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정우/신현보 한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