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북한의 핵 증강을 우선 멈추게 하는 단계적 해법을 밝힌 가운데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와 핵 능력 강화 방침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 핵 능력 확대를 중단시키고 '핵 없는 한반도'로 연결해야 하는 정부 구상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27일 담화를 내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에 담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표현을 강하게 비난했다. 김 부장은 이를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라고 규정했다. 이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는 헌법에 따라 영구적으로 고착됐다"며 "핵 능력도 순간의 정체도 없이 부단히 갱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핵무력 강화 방침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한은 핵무력을 헌법에 명시한 뒤 핵무기 생산과 핵 능력 고도화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이번 담화에서도 비핵화 요구 자체를 적대적 행위로 규정하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김 부장의 담화는 ARF가 지난 25일 공개한 의장성명을 겨냥한 것이다. ARF는 성명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의 이행을 촉구했다. 동시에 당사자 간 대화 재개와 외교적 해법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정부는 비핵화를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던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 증강을 우선 중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23일 "선비핵화를 사실상 폐기하고 선평화론으로 전환했다"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 증강을 먼저 중단시키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핵화 이전이라도 북한이 핵 증대를 우선 중단하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고,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시작해 북핵 중단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북한의 핵 활동 중단과 상응 조치를 맞바꾼 전례는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서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중유와 경수로를 제공받기로 했다. 2007년 6자회담에서도 북한의 핵시설 폐쇄와 신고, 검증 단계에 맞춰 에너지·경제 지원을 제공하는 '행동 대 행동’'원칙이 적용됐다.
문제는 현재의 북핵 상황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 활동이 영변을 넘어 우라늄 농축시설과 미신고 시설 등으로 확대된 만큼 어떤 시설과 핵물질 생산 활동을 동결 대상으로 삼을지부터 합의해야 한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복귀와 현장 검증을 받아들일지도 관건이다.
북한은 이번 담화에서 한국 정부의 북핵 우선 중단 구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이 핵 능력 강화를 계속하겠다고 밝힌 만큼 앞으로 정부가 어떤 상응 조치를 통해 북한을 핵동결 협상으로 이끌어낼지가 핵심 과제로 꼽힌다.
상응 조치의 범위도 구체화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이나 정치적 관계 개선처럼 기존 제재 체제 안에서 추진할 수 있는 조치가 있는 반면, 대규모 경제·에너지 지원이나 본격적인 제재 완화에는 유엔 안보리와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다.
윤민호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해 나간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북핵 우선 중단에 중점을 두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해법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