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0대 대형 로펌과 막걸리·소주를 만드는 주류업체가 같은 이름을 매개로 손을 잡는다. 업종도 사업 영역도 전혀 다르지만 ‘지평’이라는 공동의 이름을 고객과 만나는 브랜드 자산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법무법인 지평·지평주조 업무협약24일 업계에 따르면 법무법인 지평은 이날 ‘지평막걸리’와 ‘지평소주’를 생산하는 지평주조와 업무협약을 맺을 예정이다. 양측은 앞으로 고객 초청 행사와 내부 행사, 고객사와의 식사 자리 등에서 지평주조 제품을 활용하고 공동 행사를 여는 방안 등을 검토한다.
두 회사는 지분이나 계열 관계가 없는 별개의 기업이다. 지평주조는 1925년 경기 양평군 지평면에 세워진 양조장에서 출발한 101년 역사의 전통주 업체다. 1960년 김기환 대표의 조부가 양조장을 인수한 뒤 가업으로 이어졌으며, 2010년 김 대표가 경영을 맡아 생산시설과 전국 유통망을 확대했으며, 지난해 매출은 약 502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법무법인 지평은 2000년 설립된 지평법률사무소가 모태다. 2008년 법무법인 지성과 합병해 지평지성으로 출범한 뒤 2014년 현재 사명으로 돌아왔다. 기업 자문과 송무를 비롯해 해외 업무를 확대하며 국내 10대 대형 로펌으로 성장했고, 특허법인과 해외지사를 포함한 전체 매출은 1500억원을 넘어섰다.
이번 협업은 상품을 공동 개발하거나 상대 회사의 판매망을 이용하는 일반적인 이종 업종 제휴와 결이 다르다. 두 회사가 공유하는 것은 제품이나 고객층이 아니라 ‘지평’이라는 이름이다. 우연히 같은 이름을 사용해 온 기업들이 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고객 접점에서 활용하는 이른바 ‘동명(同名) 동맹’인 셈이다.
동명 브랜드로 고객 접점 넓혀법무법인 지평으로서는 사명을 고객이 직접 경험하는 브랜드로 확장할 수 있다. 고객과의 식사나 행사에서 ‘지평’ 소주와 막걸리를 내놓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고 로펌의 이름도 한 번 더 각인된다. 광고가 제한적이고 전문성과 신뢰가 중요한 로펌업계에서 고객 관계를 강화하는 새로운 브랜드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평주조로서도 대형 로펌의 기업 고객과 임직원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접점을 확보하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광고 대신 기업인과 전문직 종사자가 모이는 행사와 식사 자리에서 제품을 알릴 수 있어서다.
향후 협력 범위가 확대되면 지평주조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법률자문과 경영 리스크 대응에서도 법무법인 지평의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다. 두 회사가 같은 이름을 매개로 브랜드 노출뿐 아니라 각자의 고객 기반과 전문 역량까지 공유하는 협력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주류업계의 이종 협업은 그동안 식품이나 캐릭터를 결합한 한정판 제품, 문화·예술 행사를 통한 체험 마케팅에 집중돼 왔다. 대형 로펌과 주류업체가 상호의 일치만을 계기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협업의 중심이 ‘무엇을 함께 만들 것인가’에서 ‘고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경험하게 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이종 업종 협업은 공동 상품을 출시해 직접 매출을 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며 “이번 협약은 같은 이름 자체를 자산으로 삼아 로펌은 고객 관계를 강화하고 주류회사는 새로운 소비자를 만나는 구조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