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다자외교 무대를 외면하는 가운데 중국·러시아와의 진영 외교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거리를 조절하던 과거의 줄타기 외교를 넘어, 중국에는 경제를 기대고 러시아와는 군사협력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다.ARF 대신 모스크바 택한 북한20일 외교가에 따르면 북한은 오는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 지난해에 이어 불참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ARF는 북한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사실상 유일한 역내 다자안보 협의체다. 북한은 2000년 가입 이후 매년 대표를 보냈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회의에 불참했다.
ARF 개최를 앞두고 최선희 외무상은 러시아를 공식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푸틴 대통령은 19일 최 외무상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한 북한 지도부에 감사를 표하며 "러시아군을 지원한 북한군의 공적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최 외무상은 지난 5월 평양을 방문한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으로부터 ARF 참석을 직접 요청받았다. 북한의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계속 들릴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최 외무상은 마닐라행 대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찾았다. 북한 외무상이 ARF에 직접 참석한 것은 2018년 리용호 당시 외무상이 마지막이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다자외교 무대와 거리를 두고 러·중 위주의 외교를 선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일본 등이 참여하는 다자협의체에서는 비핵화와 대북제재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반면 중국·러시아와의 양자외교에서는 경제·군사 지원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다.경제는 중국, 안보는 러시아북한은 최근 중국과 경제·민생 분야의 협력을 빠르게 복원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평양에서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박태성 북한 내각총리는 지난 10일 베이징에서 시 주석을 만났다. 중국 권력서열 4위인 왕후닝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도 지난주 평양을 찾아 김정은을 만났다.
중국은 북·중 정상회담에서 경제·무역과 농업, 건설, 과학기술, 보건 등 실질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북제재와 코로나19 국경 봉쇄로 위축됐던 교역과 인적 왕래를 복원해 북한 경제를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러시아는 북한에 군사·안보 분야의 후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 병력과 무기를 제공하고 러시아는 북한군의 실전 경험 축적과 전략물자 확보를 지원하는 구조다. 2024년 체결한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토대로 양국의 군사협력도 제도화했다.
북한으로서는 경제적 생명줄인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면서 러시아를 통해 군사력과 대미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거리를 조절하던 과거의 줄타기 외교에서 한발 나아가 두 나라를 서로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는 이중 전략이라는 평가다.
북한이 ARF와 같은 다자외교 무대에서 계속 이탈하면 외교적 선택지는 오히려 좁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중·러 결속이 강해질수록 북한 문제를 둘러싼 진영 간 간극이 커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대북 공조와 남북·북미 대화 재개도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은 북·중 관계 정상화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동시 구애를 받으며 전략적 지위가 높아졌다"며 "한·미·일에 맞선 북·중·러 연대에서도 북한이 핵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