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문화예술 파트너십…더 넓게, 더 멀리 퍼진다

입력 2026-07-20 16:27

지난해 국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기업 수가 24% 늘었다. 창작 뮤지컬 지원금은 1년 새 85% 넘게 뛰었고, 지원의 무게중심도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다.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내 기업들의 메세나(mecenat·문화예술 지원) 활동이 양보다 질, 중앙보다 지역, 전통 장르보다 다양성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신호다.◇스폰서십에서 파트너십으로기업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전통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15세기부터 300여년간 문학·예술·과학 분야의 천재들을 후원해 르네상스라는 인류 문명사의 황금기를 열었다. 단테의 <신곡>,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등 오늘날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걸작들이 이 가문의 후원 아래 탄생했다. 세계적인 부를 일군 이들이 그 부를 문화예술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메디치 가문은 현대 기업 메세나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방식은 메디치 시대와 달라졌다. 과거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스폰서십이었다면, 요즘은 기업과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파트너십으로 진화했다. 유형의 부를 넘어 무형의 가치를 볼 줄 아는 안목은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이는 기업에 고급문화 마케팅이기도 하다.

최근 루이비통, 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가 예술 지원에 눈을 돌린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파리의 루이비통 재단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을 세워 앤디 워홀, 바스키아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전시를 기획한다.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은 독립영화 상영, 건축 프로젝트, 철학 아카데미 등 다원 예술을 후원한다.◇국내 기업, 메세나의 주역으로한국의 대표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자금 지원을 넘어, 문화예술산업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업 출연 문화재단들이 오랜 기간 문화예술 지원의 중심에 서 있고, 기업은행, 한국투자증권, 스타벅스 등 금융·유통 업계로도 메세나의 저변이 넓어지는 추세다. 업종도, 방식도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있다. 단발성 기부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 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려 한다는 점이다. 해외 유수 미술관에 특정 작가의 대형 설치미술을 장기 지원하거나, 국내 미술관과 손잡고 매년 중견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을 지원하는 식이다.

클래식 음악 분야도 메세나의 대표적인 사례다. 조성진, 임윤찬 등 K클래식 스타가 탄생하기까지 현대차 정몽구재단, 금호문화재단, 롯데문화재단 등이 큰 몫을 했다. 만 14세 이하 영재를 발굴해 지원하고, 해외 진출을 돕거나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명품 악기를 전도유망한 연주자에게 무상 대여하는 제도도 속속 등장했다. CJ문화재단처럼 인디음악·창작뮤지컬·단편영화 등 대중문화 생태계를 지원하는 곳도 있다. 젊고 트렌디하면서 사회적 책임(ESG)을 다하는 기업 이미지까지 확보할 수 있는 영리한 전략이다.◇총액은 줄었지만, 지원 건수는 증가한국메세나협회가 발표한 ‘2025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총액은 약 1968억7900만원으로 집계됐다. 전년(2125억2000만원) 대비 7.4% 감소한 수치로, 2022년 이후 이어지던 증가세가 3년 만에 꺾였다.

하지만 지원 기업 수(728개사)와 지원 건수(2392건)는 전년 대비 각각 24%, 28.5% 증가했다. 총액은 줄어도 참여 기업과 개별 사업 건수는 오히려 확대된,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결과다.

지역별로도 변화가 뚜렷했다. 수도권 지원 비중이 전년 대비 3.2% 감소한 반면, 비수도권은 6.9% 증가했다. 특히 부산(2.8%), 대구(1.5%), 대전(2.1%), 광주(1.8%) 등 지방 광역시의 지원 비중이 늘면서, 문화예술 지원이 점차 지방 거점 도시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분야별로는 미술·전시, 문화예술교육, 인프라 등 기존 주요 분야의 지원 금액이 줄어든 반면, 창작 뮤지컬(85.2%), 연극(27%), 영상·미디어(20.2%), 비주류·다원예술(11%) 분야는 오히려 늘었다. 기업 내부의 문화 향유 프로그램 확대와 국내 창작 뮤지컬의 해외 진출에 따른 대중적 관심 상승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들 분야가 전체 지원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 미만으로, 전체 감소 흐름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메세나협회 관계자는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금액은 전년 대비 감소했지만, 비수도권 지원 비중이 소폭 확대되고 뮤지컬·연극·영상·미디어·비주류·다원예술 등 일부 분야에 대한 지원은 늘었다”며 “기업들이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도 환경 변화에 맞춰 지원 분야를 조정하며 문화예술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