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 함께할 것인가…'공급망 생태계' 전쟁

입력 2026-07-20 16:50

과거 기업의 경쟁은 개별 기업 간 경쟁이었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더 빠르게 생산하는 기업이 시장을 선도했다. 생산성과 품질, 기술력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의 성과는 더 이상 내부 역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원재료 조달부터 생산, 물류, 판매에 이르는 공급망 전체가 하나의 경쟁 단위가 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은 전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하나의 제품이 여러 국가를 거쳐 생산되는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공급망의 안정성과 효율성은 곧 시장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가 간 이동 제한과 공장 셧다운으로 부품과 원자재 공급이 중단되면서 전 세계 제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공급망의 작은 균열 하나가 생산 차질과 매출 감소,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업은 경험적으로 학습하게 됐다. 공급망은 이제 구매 부서만의 영역이 아니라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챙겨야 할 핵심 경영 어젠다가 됐다.◇기업 간 경계 사라지나기업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핵심 부품 공급사와 물류 기업, 에너지 공급자, 데이터센터, 금융기관까지 모두 기업 경쟁력의 일부가 된다. 이른바 ‘확장된 기업의 시대’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제조기업의 경쟁력은 단순히 조립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반도체 공급사와 배터리 제조사, 물류 네트워크, 클라우드 인프라, 심지어 재생에너지 조달 능력까지도 제품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2021년 자동차 산업은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심각한 생산 차질을 겪었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수십조 원 규모의 매출 손실을 경험했고, 일부 공장은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공급망의 가장 작은 연결고리 하나가 전체 기업의 성과를 좌우한 것이다.

이와 함께 기업들이 주목하는 핵심 역량은 ‘회복탄력성’이다. 과거 공급망 전략은 가장 저렴한 곳에서 조달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효율성과 원가 절감이 최우선 가치였다. 하지만 팬데믹과 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 등 연이은 글로벌 리스크는 기업들의 공급망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공급선 다변화와 생산거점 분산, 핵심 품목의 전략 재고 확보, 공급망 가시성 강화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과거에는 비효율로 여겨졌던 중복 생산체계와 여유 재고가 이제는 위기 대응을 위한 보험으로 인식된다. 공급망 관리의 목표도 비용 최소화에서 리스크 최소화로 이동하고 있다.◇ESG 중심, 공급망으로 이동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역시 기업 내부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 최근 글로벌 규제와 투자자 요구는 ESG의 범위를 공급망 전반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 지침(CSDDD)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기업은 이제 자사 사업장뿐 아니라 협력사의 환경·인권·노동·거버넌스 수준까지 관리해야 한다.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리스크까지 기업의 책임 범위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최근 녹색전환(GX) 관련 규제는 단순히 탄소배출 관리 수준을 넘어 제품과 공급망 전반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EU 에코디자인 규정은 제품의 내구성, 재활용성, 수리 가능성 등을 요구하고 있다. 디지털제품여권(DPP)은 제품의 원산지, 원재료, 탄소발자국, 재활용 정보 등을 공급망 전체에서 추적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있다. 산림전용방지규정(EUDR), 배터리 규정,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 등은 원재료 조달부터 생산, 유통, 사용, 회수 및 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의 데이터 관리 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규제가 개별 기업이 아니라 공급망을 하나의 관리 단위로 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제품의 품질과 가격뿐 아니라 공급망의 투명성과 탄소·자원 관리 역량도 중요한 경쟁력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변화는 ESG 부서만의 과제가 아니다. 공급망, 구매, 생산, 물류, 재무, 전략, 정보기술(IT) 부문이 모두 연결된 전사적 운영체계의 변화다. 기업들은 이제 전사 운영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을 맞고 있다. 과거 경영전략이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 중심이었다면 앞으로의 운영전략은 공급망 회복탄력성, 탄소 경쟁력, 자원순환성, 데이터 투명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과거 ESG가 공시와 평가 대응 중심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공급망 설계와 생산거점 배치, 협력사 선정, 투자·구매 전략 등 경영 전반의 의사결정 이슈로 확장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탄소 데이터와 재생에너지 사용, 원재료 추적성, 인권 및 노동 기준을 협력사 선정의 핵심 기준으로 반영하고 있다. ESG는 이러한 운영체계의 일부로 재편되고 있으며, 공급망은 기업의 비용 구조를 넘어 기업가치와 시장 접근성을 결정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변화하고 있다.◇ESG 공급망 경쟁, 국가 경쟁력으로 확장공급망 ESG는 개별 기업을 넘어 국가와 지역의 산업 경쟁력과도 연결되고 있다. 베트남,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등 주요 생산거점 국가들은 재생에너지 확대, 친환경 산업단지 조성, ESG 인증 지원 등을 통해 글로벌 기업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탄소중립 목표와 연계한 산업단지 전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글로벌 제조 기업이 요구하는 친환경 인프라 구축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과거에는 인건비와 세제 혜택이 투자 유치의 핵심 요소였다면 이제는 재생에너지 접근성, 탄소배출 관리 체계, ESG 인프라가 새로운 입지 조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GX는 기업만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와 산업단지 차원의 산업 전략이 되고 있다. 이제 글로벌 기업들은 단순히 생산비용이 낮은 지역이 아니라 탄소 경쟁력과 공급망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결국 공급망 전략의 핵심 질문은 “우리 기업은 누구와 함께 성장할 것인가”다. 미래의 경쟁력은 개별 기업만의 역량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협력사의 역량과 공급망의 회복탄력성, 탄소 경쟁력, 이해관계자와의 협업 능력이 새로운 경쟁우위를 만든다. ESG의 본질 역시 지속가능한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기업은 혼자 성장하지 않는다. 공급망이 다시 쓰는 ESG 경영전략의 출발점은 바로 이 인식의 전환에 있다.

이준희 법무법인 바른 기업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