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여름은 '줄서기의 계절'이다. 6월 윔블던 테니스 대회 기간에는 관중들이 밤새 텐트를 치고 줄을 서서 당일 입장권을 구하고, 이후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BBC Proms)'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프롬스 역시 공연 당일 콘서트홀 앞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저렴한 입석 티켓을 판매하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런던의 여름, 그리고 BBC 프롬스의 귀환
입석 티켓을 구하려고 로열 앨버트홀 밖에 늘어선 줄은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프롬스 관객(Prommers)'들은 변덕스러운 영국의 여름 날씨를 견디며 새 친구를 사귀고,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이다가, 심지어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기도 한다. 2026년 시즌 개막일인 7월 17일(현지시간)에 모여든 인파 역시 앞으로 펼쳐질 음악을 기대하며 특유의 유쾌한 열기를 나눴다.
2026년 개막작 메뉴: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임윤찬
2026년 첫날 밤의 메뉴부터 살펴보자. 이번 시즌 축제의 맛보기로 기획되곤 하는 개막 공연은 '미국'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내세웠다. 프랑스와의 연결고리도 있었고, 퍼셀부터 헨델, 브리튼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해 영국 작곡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제럴드 핀지의 '성 세실리아를 위하여(For St. Cecilia)'도 연주됐다.
개막 당일 전통대로 모든 곡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핀란드인 지휘자 달리아 스타세브스카(Dalia Stasevska)가 트레이드마크인 기모노 차림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5000여 명 관객 모두의 입에 오르내린 이름은 단연 '슈퍼스타 피아니스트' 임윤찬였다. 그의 프롬스 공연은 이번이 세번째다. 올해 프롬스는 유독 한국인 솔리스트가 많이 서는 해로,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와 피아니스트 손열음도 각각 시벨리우스와 거슈윈의 음악으로 무대에 오른다. 앞서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로 청중을 열광시켰던 임윤찬이 이번에 고른 곡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였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건반 위를 활공하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긴 곡이었지만,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은 무거운 작품이 아니었다. 23분 남짓,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대비'를 채워 넣었다. 거장의 기교는 있어도 엄숙함은 전혀 없었다. 이 곡은 음색의 범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타악기를 다채롭게 활용한다. 라벨은 이 협주곡을 작곡하며 "모차르트와 생상스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임윤찬은 단순 건반을 연주한다기 보단 그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며 이에 화답했다.
1, 3악장은 재즈의 영향을 완연히 드러내며 갑작스러운 대비와 찬란한 기교로 내달렸다. 반면 2악장 아다지오에서 임윤찬의 독주는 부유하는 공기 중에 매달린 서정성 그 자체가 되어,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정점을 찍었다.
공연 전 인터뷰에서 임윤찬은 가장 황홀한 순간으로 1악장 카덴차 직후를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과거가 눈앞에 광활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다."
그는 또 2악장을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속 연민과 자비에 빗대기도 했다.
임윤찬은 이날 음악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고 다짐한 듯했다. 피날레의 몰아치는 음표의 소용돌이에 이르기까지, 힘을 적게 들이면서도 과시적이지 않은 기교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앞선 미디어 브리핑에서 그는 "항상 긴장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는데, 이런 무욕(無慾)의 태도는 이 협주곡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듯했다.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꾼 앙코르곡, 1940년대의 향수를 담은 'Autumn Leaves'은 청중을 완전한 침묵 속에 빠져들게 했다.
대서양을 건넌 재즈: 라벨과 거슈윈
다음 곡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이었다. 1920년대 재즈가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로 첫 항해를 떠나던 무렵, 라벨은 1928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투어에 나섰다. 재즈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그가 거슈윈을 만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라벨의 투어와 같은 해에 초연된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은 이날 축제의 문을 연 코플랜드의 팡파르와 라벨의 협주곡을 잇는 연결고리가 됐다.
라벨이 미국에서 영감을 받았듯 거슈윈 역시 1920년대 중반 파리와 라벨의 음악에 큰 감동을 받았고, 실제로 두 작곡가는 함께 재즈 클럽을 드나들기도 했다. 이번 연주는 런던 켄싱턴의 여름 밤을 모더니즘 황금기였던 1920년대 파리의 거리로 청중을 이끌었다. 도시를 거닐다 점점 고향에 대한 블루스풍 향수에 젖어드는 산책자의 모습이 색소폰과 트럼펫의 애상적인 소리로 그려졌다. 악단의 연주는 춤추듯 나아가, 짜릿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미국 독립 250주년, 그리고 영국
거슈윈이 미국과 유럽을 잇는 다리였다면, 코플랜드의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Fanfare for the Common Man)'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험하라는 신호였다. 금관악기와 타악기로 연주되는 이 곡은 광고 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진 곡으로, 1943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념해 작곡됐다.
이렇듯 올해 프롬스는 독립 250주년을 맞은 미국을 주제로 삼았다. 새뮤얼 바버, 존 애덤스, 스티브 라이히의 걸작들과 코플랜드, 거슈윈의 더 많은 작품이 이어질 예정이다. 출연진에는 프롬스에 데뷔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LA 필하모닉도 포함돼 있다.
공연의 2부는 미국, 프랑스를 거쳐 영국의 해안으로 돌아왔다. 프랑스계 영국인 작곡가 조세핀 스티븐슨(Josephine Stephenson)의 신작 '일출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은 채 떠나지 않기를(That the sunrise not leave us unmoved)'이 세계 초연됐다.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천상의 합창 사운드가 로열 앨버트홀 파이프 오르간의 위엄에 더해져, 이 대규모 초연 곡의 텍스처를 풍성하게 채웠다.
제럴드 핀지와 뜻밖의 피날레
마지막 곡은 제럴드 핀지(Gerald Finzi)였다. 한국에서 핀지의 음악이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올해 3월 손열음이 성남아트센터에서 핀지의 '피아노와 현을 위한 목가(Eclogue)'를 연주한 바 있다. 핀지는 비교적 짧은 삶(1901~1956년)을 살았지만, 상실된 순수함에 대한 뚜렷한 주제 의식과 비가(엘레지)풍의 매우 영국적인 색채의 음악을 다수 남겼다.
핀지의 곡은 매우 시적이다. 토마스 하디, 크리스티나 로세티, 셰익스피어, 워즈워스 등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러나 핀지는 클라리넷, 첼로,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들, 그리고 다른 관현악곡들('목가', '대환상곡과 토카타', '낙엽')을 쓴 작곡가이기도 하다.
이날 프롬스 개막 공연을 장식한 또 다른 곡은 합창곡 '성 세실리아를 위하여(For St. Cecilia)'였다. 에드먼드 블런던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은 거의 80년 전 로열 앨버트홀에서 초연됐다. 핀지가 쓴 솔로 테너 선율은 언제나 감미롭고 매혹적인데, 뉴질랜드 출신 토마스 앳킨스(Thomas Atkins)가 부른 이번 연주는 풍성하고 서정적이었고, 오케스트라 클라리넷 파트의 섬세한 기여도 돋보였다. 1947년이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급진적인 음악은 아니지만, 급진성은 애초에 핀지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영국 록밴드 오아시스 멤버 노엘 갤러거의 '원더월(Wonderwall)' 합창 편곡 버전이 뜻밖의 앙코르로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첫날 밤이 마무리됐고, 앞으로 57일 동안 85개의 콘서트가 더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공연은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런던=음악칼럼니스트 줄리언 홀(Julian 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