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1988년 뉴욕. KKR은 250억달러를 베팅해 담배·식품 기업 RJR나비스코를 삼켰다. 인수자금 대부분은 빚이었다. 이 딜을 다룬 논픽션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은 이후 40년 가까이 LBO(차입매수)의 원형이자 경고문으로 인용돼 왔다.
기업의 미래 현금흐름을 저당 잡아 오늘의 승부를 내는 방식. 펀드가 이기고 청구서는 기업과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2026년 서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홈플러스는 지난 7월 13일 전 점포 임시휴업에 들어갔다.
20일까지 긴급운영자금(DIP) 2000억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파산·청산인 상황. 16일 극적으로 2000억원을 긴급 수혈하며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구조적 파국을 막은 것인지는 미지수다. 직원 1만2000명, 협력 업체 4600여 곳의 생계가 걸렸다.
같은 시기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는 최대주주 MBK파트너스와 영풍이 고려아연의 ‘프로젝트 크루서블’ 투자 리셉션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노조 면담을 일방 취소하면서, 해외에서는 사업 주체를 자처하는 행보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MBK에 직무정지를 포함한 중징계안을 의결했다. 기관전용 사모펀드 업무집행사원(GP)을 겨냥한 국내 첫 중징계다. 38년 전 뉴욕의 ‘야만인들’과 지금 서울의 사모펀드는 얼마나 다른가.
장면1.
3조 들여 7조짜리 삼킨 ‘갭투자’의 결말
MBK가 2015년 테스코로부터 홈플러스를 삼킨 방식은 금융공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총인수금액 7조2000억원 중 자기자본은 3조2000억원. 나머지 4조원은 인수금융과 기존 차입금 등 온전히 ‘홈플러스의 몫’으로 남겨진 빚이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이를 부동산 시장의 갭투자에 빗댄다.
“7조2000억짜리를 자기 돈 약 3조만 가지고 사 온 겁니다. 일종의 부동산 갭투자와 똑같죠.”
이후 10년, MBK의 전략은 철저히 재무적 기술에 맞춰줬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알짜 점포와 물류센터 등 4조1130억원어치 유형자산을 매각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신규 투자는 7081억원, 매각액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판 점포를 다시 빌려 쓰는 ‘세일 앤 리스백’은 단기 현금을 확보해줬으나 매년 수천억원대 임차료 폭탄을 남겼다. 본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이 구조 속에서 부채비율은 2955%까지 치솟았다.
역설적인 대목도 있다. 2019년 MBK가 1만5000명의 홈플러스 무기계약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노동계는 이를 기념비적인 승리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경영진에겐 규제 리스크를 털어내고 현장 인력 숙련도를 관리하기 위한 계산된 경영 전략이었다.
노동 조건은 개선됐지만 정작 기업을 지탱하는 재무 체력은 이미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좋은 노사 합의가 잘못 설계된 자본 구조의 결함까지 덮어줄 수는 없었다.
금융 천재들의 완벽했던 계산기가 도리어 기업의 기초 체력을 거덜 낸 셈이다. 자본시장에서는 홈플러스의 청산 위기가 차입매수(LBO) 중심 전략의 한계를 증명하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은 파산해도 펀드는 수익을 챙긴다”
MBK와 최대 채권자 메리츠금융그룹 간 책임 공방은 사모펀드 모델의 본질을 보여준다. 메리츠는 MBK의 홈플러스 투자 펀드(3호 펀드)가 홈플러스 경영 악화에도 불구하고 약 1조2000억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관리보수·성과보수로 총 1조2000억원가량을 별도로 수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MBK는 홈플러스 투자금 2조5000억원을 전액 손실 처리했고 정상화에 4000억원을 지원했다고 반박했다.
다만 메리츠 측은 이 4000억원 중 상당액이 직접 현금 투입이 아닌 지급보증 형태였다고 재반박한 상태다. 청산이 확정되면 홈플러스 지분 100%를 쥔 MBK의 지분 가치는 사실상 소멸한다. 주주는 청산 배당의 최후 순위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분 가치 소멸과 펀드 단계에서의 수익·보수 수취는 별개의 문제라는 게 메리츠 측 지적의 핵심이다.
박 대표는 이 구조를 사모펀드 제도 설계 자체의 문제로 짚었다. “분명한 것은 사모펀드는 경영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렇게 경영한 곳은 거의 다 실패했습니다. 사모펀드는 경영 전문가가 아니고 인수한 업종이나 해당 분야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죠.”
장면2.
美 리셉션에서 ‘고려아연 주인 행세’한 MBK
박 대표는 고려아연을 ‘홈플러스 사태와 동일한 사례’로 본다. 근거는 세 가지다. 여기서도 2조원 이상을 LBO 방식으로 빌려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다는 점, 분쟁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 경영에 대한 욕심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특히 문제 삼은 대목은 최대주주 MBK파트너스와 영풍이 고려아연의 핵심 사업인 ‘프로젝트 크루서블’과 관련해 미국에서 투자 리셉션을 연 것이다. MBK와 영풍은 경영권도 이사회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현지에서 ‘최대주주 그룹’을 자처했다.
실제 이 사업은 MBK와 경영권 분쟁 중인 최윤범 회장 체제가 기획해 온 프로젝트다. MBK와 영풍은 지난해 이 사업의 유상증자 절차에 가처분을 신청하며 제동을 걸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자기들이 경영도 하지 않고 이사회를 장악하지도 않았는데 고려아연 주인처럼 가서 투자 리셉션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심각한 문제죠. MBK가 경영을 하고 싶어 한다는 방증이에요.”
박 대표는 고려아연이 홈플러스보다 위험도가 높다고 본다. 국가 기간산업이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은 국가 기간산업이라 홈플러스보다 심각합니다. 만약 MBK가 고려아연도 인수한다면 홈플러스와 비슷하게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치권 압박도 이어지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MBK 청문회를 추진 중이고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국민연금공단에 위탁운용사 자격 재검토를 요구했다.
리더스인덱스의 국내 5대 사모펀드(PEF) 인수 기업 실적 분석에 따르면 MBK가 인수한 기업들의 평균 ROE(자기자본이익률)는 인수 첫해 7.0%에서 3년 후 4.8%로 2.3%p 하락하며 국내 주요 사모펀드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IMM인베스트먼트 인수기업의 평균 ROE는 40%포인트 넘게 상승했다. 사모펀드의 본업은 기업 경영이 아니라 엑시트다. 기업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자본구조를 손질해 매각 가치를 높이는 금융공학이 핵심이다. 브랜드와 기술, 숙련 인력은 비용 절감 대상으로 밀리기 쉽고 업종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런 구조에서 나온다.
장면3.
반복되는 실패, 그리고 가려졌던 성공
한국 자본시장은 오랫동안 ‘자본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부했다. 그러나 금감원의 이번 중징계는 단순한 행정 처분을 넘어 시장의 패러다임이 ‘기업 지속가능성과 주주 가치’ 중심으로 전환됐음을 상징한다. 단기 수익만을 좇던 약탈적 금융 모델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구조적 변곡점이다.
MBK의 패착은 기업 영속성을 결정짓는 비재무적 비용을 과소평가한 점이다. 고용 불안과 브랜드 가치 하락은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비용이었다. 소액주주의 행동주의가 확산하면서 기업의 미래를 저당 잡는 자본을 향한 시장의 눈높이는 어느 때보다 엄격해졌다. 이제 자본은 ‘얼마나 빨리 뽑아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기업의 가치를 키우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MBK는 2005년 설립된 동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운용자산 45조원)다. ING생명과 코웨이 매각 사례로 창업자인 김병주 회장이 ‘M&A의 귀재’라는 평판을 얻었으나 그 이면엔 항상 대규모 구조조정과 기업의 자산 파편화가 있었다. 오렌지라이프 인수 당시 고용 안정을 공언했으나 6개월 만에 임원진 물갈이와 대규모 감축을 단행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홈플러스는 단발적 실패 사례가 아니다. 영화엔지니어링, 딜라이브, 네파 등 MBK의 주요 실패 사례는 같은 패턴을 공유한다. 인수 대금의 절반가량을 차입으로 조달하고 이후 상환 부담이 장기 투자 여력을 잠식하는 구조다.
홈플러스 청산 위기 속에서도 펀드 단계에서 1조2000억원 규모의 수익과 별도의 관리보수를 수취했다는 지적은 운용사의 보수가 기업의 생존보다 우선되는 사모펀드의 도덕적 해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전문성 결여 또한 고질적 약점이다. 유통부터 제련, 최근에는 바이오까지 10여 개 업종을 넘나드는 ‘규모의 경제’는 특정 분야의 깊이 있는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홈플러스 등기임원 대부분을 MBK 인사로 채우고도 알짜 점포 매각 외에 신규 투자에는 소홀했다.
인수 11년 차 투자금 회수가 불투명해진 지금, MBK가 자랑하던 문어발식 확장 전략은 전문성 부족이라는 치명적 약점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시장은 가격만 아는 자본이 아닌, 기업의 가치를 키우는 실질적인 경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야만인 시대’를 어떻게 건넜나
RJR나비스코 딜이 상징하는 1980년대 미국 LBO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5년 KKR·베인캐피털·보르나도가 66억달러에 인수한 완구업체 토이저러스는 이 모델의 실패를 재확인시킨 사례다. 인수 부채의 연간 이자 부담이 수억 달러에 달하면서 신사업 투자 여력이 소진됐고 2017년 파산보호 신청, 이듬해 청산으로 이어졌다. 3만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두 사례 모두 부채를 떠안는 주체가 인수자가 아니라 피인수 기업이라는 점에서 홈플러스와 유사하다. 차이는 사후 대응이다. 토이저러스 파산 이후 미국에서는 사모펀드 책임을 강화하자는 논의가 정치권 중심으로 본격화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2019년 발의한 ‘월가 약탈 방지법(Stop Wall Street Looting Act)’은 인수 부채에 대해 운용사에도 연대책임을 지우고 채권자 보호를 배당보다 우선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비록 입법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미국에서는 사모펀드의 과도한 차입매수와 배당 재조달(dividend recap)에 대한 정치권과 시장의 감시가 한층 강화됐다. 2024년에는 워런 의원이 의료기업 사태 등을 계기로 법안을 다시 발의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 논의가 이제 시작이다. 이번 금감원 중징계 예고는 GP를 겨냥한 첫 사례이지만 근거는 RCPS 조건 변경 과정의 불건전영업행위·내부통제 위반 혐의에 국한된다. LBO 구조 자체, 즉 사모펀드가 인수금융 상환 부담을 피인수 기업에 떠넘기는 관행을 제한하는 법제는 없다.
홈플러스는 끝이 아니다
박 대표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태생적 호흡 차이를 지적한다. 단기 수익률(ROI)을 좇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문법을 제조업 중심의 한국 산업 구조에 그대로 이식한 결과가 현재의 파국을 만들었다는 진단이다. 그는 사모펀드의 자율적 정화 기능은 이미 상실했다고 봤다.
38년 전 뉴욕을 휩쓸었던 ‘야만인’들이 시장의 통제와 규제 강화에 밀려 힘을 잃었듯, 한국 자본시장 역시 뼈를 깎는 제도 혁신이 필수적이다. 이번 중징계에 대해서도 “단발성 처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결국 핵심은 자본에 ‘한국 산업 구조에 맞는 옷’을 입히는 일이다.
투기적 질주를 방치한다면 홈플러스의 파국은 고려아연을 넘어 산업 전반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박 대표가 제시하는 해법은 사모펀드가 투기꾼이 아닌 산업의 동반자로 기능하도록 강제하는 제도적 안전장치다.
“사모펀드는 시장의 불합리한 가치를 조정하는 ‘메기’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분쟁 현장을 배회하며 차익만 노리는 ‘하이에나’로 전락했습니다. 과도한 LBO 원천 차단, 인수 분야에 대한 전문성 요건 심사 강화, 보유 기간의 5~8년 제한 등 한국 산업 구조에 맞는 엄격한 규제 설계가 없다면 홈플러스의 파국은 고려아연에서 반드시 재현될 것입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