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16세기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맞이한 여섯 왕비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정리한 표현이다. 세 명의 캐서린과 두 명의 앤, 한 명의 제인 중 영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은 이는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이다. 앤이라는 친근한 이름을 가진 여인이 국왕의 이혼, 국교회 수립 같은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다가 참수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게 대중의 동정을 샀다. 드라마 같은 삶은 ‘천일의 앤’이라는 영화 소재도 됐다.
앤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은총’ ‘은혜’를 뜻하는 ‘한나’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메리, 샬럿, 루이즈 등과 함께 영국 왕실의 여성 일원에게 붙는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1642년 이후 영국 국왕의 장녀 중 7명에게만 부여된 ‘프린세스 로열(Princess Royal)’ 작위 수여자 중 2대와 7대가 ‘앤 공주’다.
오랫동안 영국 왕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으로 꼽혔다. 찰스 3세 국왕의 아들인 윌리엄 왕자는 공군 파일럿으로 복무했다. 해리 왕자는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직접 갔다. 찰스 3세의 동생인 앤드루는 포클랜드전쟁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공주 시절 차량정비 장교로 활동하며 나치 독일에 맞섰다. 평화 시에도 왕실 멤버는 각종 사회봉사활동과 외교에 힘을 쏟는다. 윌리엄이나 앤 같은 친숙한 이름은 유서 깊은 왕실 후광과 어우러져 큰 효과를 빚어낸다.
찰스 3세의 여동생 앤 공주의 방한 행보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제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 6·25전쟁 당시 산화한 영연방국 장병의 희생을 기린 데 이어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를 찾았다. 청와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환담도 했다.
영국 공주 방문은 영국이 피를 흘리며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힘썼고 한국 조선업의 출발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1970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고서 영국 조선기술회사(A&P애플도어)와 은행(바클레이스)을 설득한 영국과의 남다른 인연도 다시 부각됐다. 영국의 왕실 외교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