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으로 무대 넓힌 조성진...브람스의 인생을 거슬러 올랐다

입력 2026-07-15 15:55
수정 2026-07-17 10:52
실내악엔 독주나 교향악에선 찾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연주자 네댓이 서로의 소리를 한껏 신뢰하며 같은 숨결을 공유하는 모습은 훌륭한 실내악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 1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 체임버 콘서트’도 그 풍경으로 관객 가슴을 벅차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성진이 오래 교감해온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과 함께 관객 2000여 명에게 실내악의 멋을 제대로 보여준 자리였다.



푹스의 클라리넷, 고색창연한 정취 드러내

조성진은 올해 롯데콘서트홀의 인하우스 아티스트로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 레퍼토리는 오롯이 브람스로만 채웠다. 왜 브람스인지는 프로그램 북으로 밝히지 않았기에 관객은 직접 감상하며 구성 의도를 추리해야 했다. 공연 1부에선 실내악에서 자주 보기 어려운 클라리넷과 호른이 주인공을 맡았다. 첫 시작은 브람스의 ‘클라리넷 삼중주 가단조’.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의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리하르트 뮐펠트의 연주에 감명받은 브람스가 은퇴하려던 생각을 접고 다시 펜을 잡아 57세에 쓴 곡이다.

클라리넷 연주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인 벤젤 푹스가 맡았다. 합을 맞출 첼로는 솔로·실내악 연주를 병행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거장 키안 솔타니가 켰다. 그는 첫 활 긋기만으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고풍스럽고 그윽한 첼로만의 저음역 울림이 단번에 롯데콘서트홀 천장까지 닿았다. 푹스의 클라리넷도 따뜻함과 맑음을 겸비해 고색창연한 정취가 있었다. 1악장 끝에 나온 살짝 빠지는 듯한 바람 소리마저도 클라리넷만의 적막함을 키우는 장치가 됐다.



피아노는 클라리넷과 첼로의 대화를 도왔다. 클라리넷과 같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연출하며 첼로의 현란한 보잉이 빛날 수 있도록 했다. 3악장에선 이들 악기가 나란히 음량을 급격하게 바꾸면서 감미로움과 긴장감 사이를 오가는 모습이 돋보였다면 4악장에선 열정 사이에 서린 절도가 인상적이었다. 첼로와 피아노의 힘이 커지면서 클라리넷이 뒤로 밀려나는 듯한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지만 각자의 음색만은 뚜렷했다. 서로가 공유하는 긴장감의 감도도 비슷했다. 다른 맛 반찬이 어우러지는 한식 정찬과 닮은 음악이었다.

도어의 호른, 그윽하고 흔들림 없이

이어진 호른 삼중주에선 1744년산 델 제수 ‘드 베리오’ 바이올린을 쓰고 있는 다이신 카시모토와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호른 연주자인 슈테판 도어가 조성진과 합을 맞췄다. 피아노를 제외한 모든 악기가 앞선 곡과 달라진다는 점에서 실내악의 다채로움을 만끽하기 좋았다. 이 곡은 30대 초반 나이였던 브람스가 독일 바덴바덴 숲을 산책하다가 들은 사냥 나팔 소리에서 착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타계한 그의 어머니를 애도하는 곡이자 어릴 적 호른을 가르친 아버지와의 추억과도 얽혀 있는 곡이다.



바덴바덴 숲은 햇빛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침엽수가 빽빽해 ‘검은 숲’으로 불린다. 이 숲의 소리를 그리는 도어의 호른도 이 숲의 풍경처럼 먹먹하면서도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앞서지 않고 다른 연주자와 보조를 맞췄다. 카시모토의 바이올린은 비단처럼 유려해 그 자체로 매력이 분명했지만 2악장에선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었다. 피아노와 호른이 분주해지는 이 악장에선 조금 더 바이올린만의 민첩함과 활력을 더 쏟아낼 만했다.

어머니를 애도하는 듯한 3악장은 황홀했다. 먹먹한 호른 소리가 흔들림 없이 이어지는 게 하늘의 영(靈)에게 닿으려는 고동을 그리는 듯했다. 한 음씩 올라가는 피아노는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을 놓았다. 이따금 튀어나오는 바이올린의 또렷한 소리는 구름 사이에서 흔들리는 햇빛처럼 피아노의 상승 음형을 비췄다. 마지막 4악장에선 라벨의 음악에서 찾을 만한 피아노의 맑은 통통거림이 시작부터 빛났다. 바이올린은 더 자유로워졌고 호른은 안정감과 활기를 더했다. 서로의 다이내믹도 더 긴밀하게 맞물렸다.

피아노로 그린 물안개, 현악기를 적셨다

2부 연주곡은 20대 후반의 브람스에게 성공을 안겨줬던 피아노 사중주 1번. 조성진이 2014년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한 곡이다. 브람스의 말년에서 청년으로 돌아가는 공연 흐름이었다. 이번 협연자론 카시모토, 솔타니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인 비올리스트 박경민이 함께했다. 모두 베를린에서 조성진과 가까이했던 사이다. 그만큼 이들의 사중주는 시작부터 지향점이 같았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음역대에서 개성을 지켰다.



2악장에선 도자기처럼 소리를 빚어내는 조성진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현악이 돋보이는 구간에선 피아노 소리에 촉촉함과 부드러움이 가득해 무대에 물안개가 올라온 듯했다. 현악의 음압을 피아니스트가 고스란히 손등으로 받아가며 섬세하게 타건을 조절하는 인상이었다. 다른 악기들을 이어주는 비올라의 존재 덕분에 피아니스트가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많아졌다. 강렬한 춤곡 리듬이 돋보이는 4악장에선 나란히 점진적으로 숨을 죽이는 연주자들의 재치가 돋보였다.

연주자들은 벌의 날갯짓을 추적하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피날레를 맞았다. 무아지경이 끝나자 객석에서 고음 함성이 쏟아졌다. 앙코르는 낭만주의 실내악의 정수로 불리는 슈만의 피아노 사중주 내림마장조 중 3악장. 들뜬 열기를 정리된 여운으로 갈음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차분한 음악 사이에 간간이 서로의 숨결이 들리기도 했다. 그 숨결이 누구의 것이든 실내악의 내밀한 매력을 알려주기엔 충분했다. 조성진은 피아노 뚜껑을 닫는 것으로 끝을 알렸다. 못내 아쉬웠던 관객들은 롯데콘서트홀 로비 창문을 두들기는 세찬 빗소리를 들을 때야 그 끝을 실감했다.



조성진의 체임버 콘서트는 계속된다. 오는 16일 부천아트센터, 17일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피아노 리사이틀은 오는 19일 롯데콘서트홀, 26일 세종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