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맥이요? 저도 한 잔 마셔보고 싶어요!”
공연 막바지, 연출가이자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구자하가 유리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기 시작하자 객석 곳곳에서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서른 잔 남짓한 소맥은 순식간에 동났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대 위로 올라와 김치전과 미역 오이냉국, 버섯튀김을 맛보고 남은 소맥을 나눠 마셨다. 극장은 어느새 공연장이 아니라 서울 골목 어딘가의 포장마차로 변해 있었다.
최고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7월의 프랑스 남부 아비뇽. 에어컨조차 나오지 않는 공연장 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후텁지근했다. 관객들은 프로그램북과 부채로 연신 얼굴을 식히면서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웃음이 터질 때마다 객석의 열기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한국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실험극이지만, 이곳에서는 한국의 음식과 정서, 이주민의 삶을 풀어낸 공연이 현지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내고 있다.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구자하의 ‘하리보 김치’는 한국어가 올해 축제의 ‘초청 언어’로 선정된 가운데 한국 공연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올해 ‘연극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입센상을 수상한 구자하는 이번 축제에 ‘쿠쿠(Cuckoo)’와 ‘한국 연극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 ‘하리보 김치’ 등 세 작품을 동시에 공식 초청받았다. 한 예술가의 작품 세 편이 나란히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일 만큼 유럽 공연계에서 그의 위상은 확고하다.
‘하리보 김치’는 한국의 포장마차를 무대 위에 옮겨 놓은 듯한 형식을 취한다. 구자하는 포장마차 주인이자 요리사가 돼 관객 두 명을 무대 위 손님으로 맞는다. 직접 김치전을 부치고 오이와 당근 등 재료를 썬다. 참기름과 구운 전 냄새가 객석까지 번지고, 도마를 두드리는 칼 소리가 리듬처럼 극장을 채운다. 관객은 공연을 눈과 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냄새 맡고, 맛보고, 마시며 체험한다.
구자하는 요리하는 사이 서울에서 독일 베를린을 거쳐 벨기에에 정착하기까지 자신의 이주 경험을 풀어놓는다. 가장 큰 웃음이 터진 것은 베를린 유학 시절의 김치 에피소드였다. 한국의 할머니가 보내준 김치 10㎏이 발효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폭발해 빨간 김칫국물이 사방에 튀자 이웃들이 강력 범죄가 벌어진 것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쾌한 일화는 이내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마주한 보이지 않는 장벽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나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흔들림이 영상과 음악, 건조한 유머 속에 스며든다. 달팽이와 장어, 하리보 젤리곰 같은 비인간 캐릭터들이 노래하고 대화하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작품은 음식이라는 가장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매개를 통해 한 개인의 이주 경험을 상실과 고립, 소속감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객석의 반응이었다. 구자하 특유의 농담은 번역 자막과 문화적 차이를 가볍게 넘어 폭소가 터졌다. 공연 후반 소맥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경쟁하듯 손을 내밀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회식 문화가 이들에게는 신선한 발견이자 유쾌한 놀이가 된 셈이다.
공연이 끝나자 상당수 관객이 무대로 올라왔다. 처음 보는 한국 음식을 주저하지 않고 입에 넣었다. 더운 공연장에서 이미 땀범벅이 된 관객들은 음식을 먹고 또다시 부채질하면서도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단순히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포장마차와 식문화를 몸소 체험하려는 열기가 뚜렷했다.
파리에서 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줄리 리비에르 씨는 “무척 새롭고 감동적인 공연이었다”며 “이주민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감됐다”고 말했다. 그는 “김치는 알고 있었지만 소맥은 처음 들어봤다”며 “올해 한국어가 초청 언어라고 해 한국 공연을 꼭 한 편 보고 싶었는데 ‘하리보 김치’라는 제목에 끌렸다”고 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온 다니엘라 팔라르모 씨는 “한국 문화는 여전히 신비롭게 느껴지지만 이탈리아와 의외로 연결되는 지점이 많은 것 같다”며 “서로 다른 문화 같으면서도 닮은 점이 있어 흥미로웠다”고 했다. 영화 프로덕션에서 일한다는 또 다른 이탈리아 관객은 “봉준호와 박찬욱 감독의 팬이라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공연을 보고 나니 음식과 일상까지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비뇽=설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