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업계에서 1990년대생 오너 후계자가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아직 30대 초중반이지만 일부는 부사장과 전무, 사내이사에 올라 주요 투자와 사업 전략에 관여하고 있다. 국내 영업이나 생산관리보다 해외사업과 신사업, 브랜드 전략을 맡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농심·삼양, 30대 후계자 경영 전면에세대교체 움직임이 가장 뚜렷한 곳은 농심이다. 22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신동원 농심 회장의 장남인 1993년생 신상열 부사장은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2019년 농심 경영기획실에 입사한 지 7년 만에 이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단순한 승계 수업을 넘어 주요 경영 판단에 권한과 책임을 지는 단계로 올라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 부사장은 미래사업실장을 맡아 건강기능식품과 스마트팜, 펫푸드 등 신사업을 발굴하고 있다. 농심홀딩스아메리카 최고경영자에 이어 올해 4월부터 중국 사업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농심 홍콩법인 임원도 겸하며 미국과 중국 사업 전반으로 보폭을 넓혔다.
삼양식품에서는 1994년생 전병우 전무가 빠르게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김정수 회장의 장남인 전 전무는 2019년 입사해 해외사업과 신사업을 거친 뒤 최고운영책임자에 올랐다. 삼양라운드스퀘어 전략기획본부장과 삼양식품 헬스케어사업부장도 맡고 있다.
전 전무의 승계 과정은 삼양식품의 해외 성장과 맞물려 있다. 불닭볶음면을 앞세운 글로벌 사업 확대와 중국 생산기지 구축 등에 참여했다. 국내에서 이미 자리 잡은 사업을 물려받기보다 회사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해외사업에서 경영 능력을 검증받고 있는 것이다.
CJ는 미래전략, 오뚜기는 국내외 실무 수업CJ그룹에서는 1990년생 이선호 CJ 미래기획그룹장이 그룹 차원의 미래사업을 맡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 그룹장은 CJ제일제당에서 글로벌 식품사업과 식품성장추진 업무를 담당한 뒤 지주사로 이동했다.
미래기획그룹은 그룹의 중장기 성장전략과 신규 사업을 발굴하는 조직이다. 이 그룹장은 식품 계열사의 해외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그룹 전체의 사업 포트폴리오와 미래 먹거리를 살피고 있다. 특정 계열사 대표로 곧바로 이동하기보다 지주사에서 식품과 콘텐츠, 물류 등 그룹 사업을 두루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다.
오뚜기는 상대적으로 속도 조절에 나선 모습이다. 함영준 오뚜기 회장의 장남인 1991년생 함윤식 부장은 2021년 사원으로 입사해 경영관리와 생산 관련 부서를 거쳤다. 현재 마케팅실 부장으로 제품과 브랜드 전략 업무를 맡고 있지만 아직 임원이나 등기이사에는 오르지 않았다.
장녀인 1992년생 함연지 씨는 미국법인 오뚜기아메리카에서 근무하고 있다. 배우 활동을 사실상 정리하고 현지 마케팅과 사업 실무를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뚜기는 남매를 국내 본사와 미국법인에 각각 배치해 승계 구도를 서두르기보다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있다. 생산·영업보다 해외·신사업에 집중 배치하림그룹에서는 1992년생 김준영 팬오션 상무보가 투자와 인수·합병 업무를 맡고 있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 상무보는 하림지주와 사모펀드 운용사 JKL파트너스 등을 거쳤다. 이후 팬오션으로 이동해 그룹의 투자와 사업 재편 업무에 관여하고 있다.
김 상무보는 하림그룹 승계 구조의 핵심 회사인 올품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다른 1990년대생 후계자들이 신사업이나 해외사업에서 성과를 검증받고 있다면, 김 상무보는 투자회사와 해운 계열사를 거치며 자본시장과 인수·합병 경험을 쌓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90년대생 후계자의 공통점은 기존 사업의 관리보다 다음 성장동력을 찾는 업무에 배치됐다는 것이다. 신상열 부사장은 미래사업, 전병우 전무는 해외사업과 헬스케어, 이선호 그룹장은 그룹 미래전략을 맡았다. 함윤식 부장과 함연지 씨는 브랜드와 미국시장, 김준영 상무보는 투자와 인수·합병을 경험하고 있다.
성장동력 발굴 시험대과거 식품기업 오너 자녀들이 재무와 경영지원, 생산 현장을 차례로 거친 뒤 계열사 대표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처음부터 해외와 신사업에 배치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저출생과 내수 부진으로 국내 식품시장의 성장이 제한된 가운데 차세대 경영자에게 기존 사업을 지키는 역할보다 새로운 시장을 찾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승계 속도에는 차이가 있다. 농심과 삼양식품은 30대 후계자를 부사장과 전무에 올리고 이사회와 핵심 경영조직에 배치했다. CJ는 지주사 미래전략 조직을 맡겼고, 하림은 투자와 인수·합병 경험을 쌓게 하고 있다. 오뚜기는 아직 부장과 해외법인 직원으로 두며 실무 수업에 무게를 싣고 있다.
다만 빠른 승진에 대한 시선은 부담이다. 오너 일가라는 이유로 짧은 기간에 핵심 보직을 맡았다는 지적을 피하려면 해외 매출과 신사업 실적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식품업계의 1990년대생 세대교체는 직함을 물려받는 단계를 넘어 실제 경영 능력을 검증받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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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