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들의 포트폴리오]
‘영국 중앙은행을 무너뜨린 투자자들’로 유명한 월가의 대가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지난 1분기 투자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재편했다. 포트폴리오 회전율을 뜻하는 턴오버는 약 58% 수준이었다. 보유 종목을 대거 정리하면서 미국 상장 주식 및 관련 옵션의 평가액은 직전 분기보다 약 11억1000만 달러(약 1조6687억 원) 감소했다.
23개 종목을 전량 매도한 가운데 19개 종목은 비중을 줄였다. 미국 금융주 전반에 대한 익스포저(위험 노출액)를 크게 줄인 게 특징이다. 바이오·반도체·남아메리카 관련 자산은 확대했다. 31개 종목을 새로 담았으며, 13개 종목은 추가 매수에 나섰다. 특히, 의료·바이오 기업인 나테라(티커명 NTRA)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핵심 포지션으로 내세웠다.
암 진단 기업에 베팅…나테라 비중 5%p↑
지난 5월 15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듀케인 패밀리오피스의 올해 1분기(3월 31일 기준) 13F(주식 보유 현황) 공시에 따르면, 듀케인 패밀리오피스의 미국 상장 주식 포트폴리오 총가치는 33억8000만 달러(약 5조815억 원)로 직전 분기 대비 24.7% 감소했다. 주가 변동을 제외한 순매매에 따른 자금 유출은 전체 포트폴리오의 약 22% 수준이었다. 듀케인 패밀리오피스는 드러켄밀러의 개인 및 가족 자산을 운용하는 미국의 사설 투자 회사다.
1분기 드러켄밀러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종목은 나테라다. 혈액을 비롯한 체액 속에 떠다니는 DNA 조각을 분석해 임신, 암, 장기 이식 관련 위험을 진단하는 미국의 정밀 의료 기업이다. 1분기 55만2249주를 추가로 매입하며 보유 주식을 총 306만3606주로 늘렸다.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직전 분기 대비 5.34%포인트 늘어난 18.14%를 기록했다. 전체 보유 종목 가운데 압도적인 1위다.
나테라의 사업 중 투자자가 가장 주목하는 사업은 ‘시그나테라’로 꼽힌다. 암 수술 또는 항암 치료 후 환자의 혈액에서 종양 DNA를 검출하는 분자잔존질환(MRD) 검사의 일종이다. 영상 검사보다 앞서 재발 위험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닐 탈워 종양내과 의사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종양이 영상 검사에서 보일 때쯤이면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많다”며 “항암화학요법은 미세질환을 제거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 국영 에너지 기업인 YPF의 비중을 직전 분기 0.49%에서 4.43%로 확대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2월 아르헨티나의 올해 에너지 무역 흑자가 최대 100억 달러(약 15조 원)에 달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YPF 등이 개발 중인 바카 무에르타 유전의 생산 확대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한 것도 기대감을 더했다.
금융·기술 섹터서 차익 실현
매수 자금의 일부는 미국 대형 기술주를 팔아 마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드러켄밀러는 1분기 아마존 69만2140주를 매도했다. 포트폴리오 비중을 3.79%에서 0.28%로 크게 줄였다. 같은 기간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주식은 38만5000주를 전량 매도했다. 두 종목 모두 지난해 하반기에 다시 구축한 포지션이다.
포트폴리오에서 비중이 가장 크게 줄어든 종목은 미국 금융주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였다. 드러켄밀러는 직전 분기 기준 549만5600주를 보유했던 파이낸셜 셀렉트 섹터 SPDR ETF(XLF)를 전량 매도했다. XLF는 벅셔해서웨이, JP모건, 마스터카드 등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에 포함된 금융 기업들의 주가 흐름을 추종하는 ETF 상품이다. 미국 금융주가 지난해 급등세를 기록한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신용카드 금리 상한제’ 도입을 제안하자 차익 실현에 나섰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아마존과 알파벳에이어 다섯 번째로 비중을 많이 줄인 종목은 쿠팡(CPNG)이다. 410만5424주를 처분하면서 비중은 2.06%포인트 감소했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약 3400만 명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겪었다. 지난 2월에는 추가 피해 고객이 확인되는 등 1분기에도 악재는 계속됐다. 같은 달 발표된 2025년 4분기 실적에서는 26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美 증시 상승세, AI·빅테크 너머로 확산하나
반도체 섹터 내 포트폴리오 조정도 주목할 만하다. 브로드컴 19만5955주(+1.80%P)를 비롯해 인텔, ARM홀딩스, 마이크론 등 인공지능(AI) 반도체 관련 종목을 새로 담았다. 한편, TSMC는 54만3085주에서 49만5280주로 줄였다. 포트폴리오 내 비중은 4.96%로 여전히 반도체 종목 중 가장 컸다.
래티스반도체는 65.1%(60만2835주) 줄인 가운데 엔테그리스, 온세미컨덕터, 울프스피드 등 3개 종목은 전량 매도했다.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비중이 높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183만9325주를 추가 매수하면서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23%포인트 늘었다. AI 랠리뿐 아니라 비AI 반도체 업황 회복을 염두에 둔 투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S&P500 구성 종목을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추종하는 인베스코 S&P500 동일가중 ETF(RSP)는 현물을 줄이는 대신 콜옵션으로 상승 가능성에 베팅했다. 직전 분기 포트폴리오의 5%를 차지하던 RSP 117만3925주를 전량 매도했다. 동시에 82만1000주 상당의 RSP 콜옵션을 새로 담았다. 단, 13F 자료만으로는 만기일과 행사가격 등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이 같은 전략을 통해 드러켄밀러는 빅테크를 넘어 S&P500 전반으로 상승세가 확산할 것이라 전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듀케인 패밀리오피스는 1981년 설립된 듀케인 캐피털 매니지먼트를 전신으로 한다. 2010년 외부 투자자에게 자금을 반환한 뒤 펀드를 폐쇄하면서 패밀리오피스 형태로 전환했다. 세계 경제와 금융 시장의 흐름을 분석해 주식, 채권, 원자재 등 자산에 투자하는 ‘글로벌 매크로’ 전략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주형 한국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