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만 짓는다고 되나"…정주 여건 미흡한 반도체 벨트 한계 [더 머니이스트-심형석의 부동산 정석]

입력 2026-07-15 06:30
정부가 대규모 양산, 기술 실증, 연구개발(R&D)을 동시에 실현하겠다는 '기업형 첨단도시' 프로젝트를 내놨습니다. 기업의 투자가 단순한 공장 증설에 그치지 않고 지역 성장으로 이어지게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특히 반도체 서남권 투자를 중심으로 한 '뉴 공간 프로젝트'는 지방 경제의 새로운 성장축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만 정책의 취지가 선하다고 해서 실행 가능성이 자동으로 담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은 입지의 산업적 타당성입니다. 반도체 산업의 핵심은 장비와 부지에만 있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석·박사급 고급 연구 인력과 숙련 인력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산업 생태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현재 반도체 인력은 수도권 남부와 기존 산업 클러스터에 집중돼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고급 연구 인력이 교육·의료·문화 인프라가 충분한 지역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나옵니다. 자녀 교육과 가족 생활, 의료 접근성, 문화 여건이 부족한 곳에 생산시설부터 짓는 방식으로는 인재 유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프라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양의 깨끗한 물과 안정적인 전력을 필요로 합니다. 용수와 전력망은 단기간에 갖출 수 있는 시설이 아닙니다. 송배전망 확충, 수자원 확보, 산업단지와 배후도시의 연결성이 함께 설계돼야 합니다. 공장 건설과 인프라 확충의 속도가 맞지 않으면 생산시설을 지어놓고도 가동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정책 실험을 경험했습니다. 기업도시와 혁신도시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됐지만 상당수 지역에서 정주 여건 부족과 산업 생태계 미성숙이라는 과제를 남겼습니다. 평일에는 사람이 오가지만 주말에는 활력이 떨어지는 도시도 적지 않습니다. 도시를 조성하는 것과 도시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기업형 첨단도시를 추진하기에 앞서 기존 혁신도시를 어떻게 고도화할 것인지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이미 조성된 기반시설과 공공기관 이전 효과를 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신도시 모델을 병행하면 재정과 행정 역량이 분산될 수 있습니다. 기존 혁신도시에 교육, 의료, 문화, 주거 인프라를 보강하고 기업과 인재가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반도체는 일반적인 지역 개발사업과 다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과 직결된 전략 산업입니다. 입지는 정치적 상징성보다 산업 생태계, 인재 확보, 물류, 전력, 용수, 연구개발 연계성 등을 종합해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경쟁은 속도와 효율의 싸움입니다. 기업이 최적 입지를 선택하고 인재가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 일정도 현실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글로벌 반도체 생산라인 하나를 구축하는 데도 수년의 시간과 정밀한 검증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도시 기능까지 결합하려면 더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임기 내 성과를 보여주는 방식보다 장기 계획과 단계별 실행 전략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투자 규모 역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상징적 효과가 크지만 실제 재원 조달과 민간 투자 유인, 기업의 재무 부담, 인프라 투자 주체 등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합니다. 대기업의 투자 여력과 국가 재정, 지방정부의 부담 능력까지 함께 검토해야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됩니다.

시장은 정책 메시지보다 실행 가능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반도체 산업은 인재와 효율, 공급망 안정성이 핵심입니다. 생산라인을 분산하는 결정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인지, 아니면 기업의 운영 효율을 떨어뜨리는 방향인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지역 균형 발전과 산업 경쟁력은 함께 가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둘 다 얻기 어렵습니다.

양산 공장과 기술 실증, 연구 기능을 한곳에 모으겠다는 구상은 매력적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느냐입니다. 기업이 몰려오는 도시가 되려면 보육, 교육, 의료, 문화 등 생활 인프라가 먼저 갖춰져야 합니다. 좋은 일자리와 좋은 생활 환경이 함께 있어야 인재가 움직입니다.

정주 환경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닙니다. 지역에 사람을 붙잡아두는 핵심 경쟁력입니다. 우수 기업과 창의적인 인재를 동시에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합니다. 인구 유출과 지역 소멸 위기에 대응하려면 산업시설과 주거시설을 나란히 짓는 수준을 넘어, 가족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생활권을 설계해야 합니다.

기업형 첨단도시가 성공하려면 정부가 모든 것을 설계하고 기업을 따라오게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업과 인재가 원하는 조건을 먼저 확인하고, 정부는 필요한 인프라와 제도적 기반을 정교하게 마련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합니다. 공급자 중심의 도시 개발이 아니라 수요자 중심의 산업 도시 전략이 필요합니다.

반도체 벨트의 성패는 공장 수나 투자 규모가 아니라 사람이 머무는 도시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주 기능이 없는 첨단도시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기업형 첨단도시가 지역 균형 발전의 실질적 대안이 되려면 산업 입지와 생활 인프라, 인재 전략을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심형석 우대빵연구소 소장·美IA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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