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삼전닉스’가 있다면 대만에는 TSMC가 있다.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확보한 2010년대 중반 이후 대만 경제에서 ‘1극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대만 정부와 대학, 장비·소재 업체 등이 TSMC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협력한 결과다. TSMC의 성장은 산업을 넘어 대만 사회의 모습까지 바꿨다. 올해 들어 한국에서 본격화한 ‘삼성전자 성과급 논란’과 동탄 등 ‘셔세권’(셔틀버스 탑승 가능 지역) 집값 상승도 대만이 먼저 경험한 변화다.
기자가 대만 타이베이를 찾은 지난 10일 TSMC 시가총액은 62조6300억대만달러(약 2931조7100억원)까지 뛰며 대만 증시 전체 시총의 47%를 넘어섰다.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규모다.
‘거대한 산’은 새로운 계층도 낳았다. TSMC 직원의 지난해 평균 수입은 407만2000대만달러(약 1억9207만원)로 대만 전체 직장인 평균(76만632대만달러·약 3587만원)의 약 5.4배다. 부동산 가격도 끌어올렸다. TSMC 본사가 들어선 신주과학단지 인근 집값은 지난 5년간 90% 가까이 치솟았다.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상승 폭이다.
이는 새로운 계층 탄생과 사회 풍속도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입시학원에는 의대 대신 이공계 학과를 지원하는 최상위권 학생이 줄을 잇는다. TSMC 직원의 자녀가 차별화된 교육을 발판으로 부모 회사에 입사하는 계층 대물림 현상까지 나타났다.
대만의 모습은 반도체 호황 초입에 들어선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고편’이 될 수 있다. 반도체 메가사이클이 지속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터 집값까지 변화가 나타날 수 있어서다.
TSMC를 필두로 한 ‘반도체 원팀 체제’는 배울 점이다. 자오샹커 대만국립칭화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만 반도체산업의 성공은 TSMC 한 기업이 아니라 정부, 대학, 과학단지, 장비·소재 업체, 고객사가 하나의 생태계처럼 움직인 결과”라며 “원팀 체제가 기술 개발 속도와 수율, 고객 대응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월급은 의사 추월, 집값은 타이베이 압도…대만 흔든 'TSMC 신드롬'지난 10일 대만 신주에서 만난 TSMC 4년 차 엔지니어 류쥔훙(가명·34). 그의 꿈은 반도체산업에서 일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자신과 같은 반도체 엔지니어로 키우는 것이다. ‘간을 팔아치운다(賣肝)’고 할 만큼 고된 노동을 쉬는 날 없이 계속하고 있지만 3년 안에 내 집을 장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성과급을 포함해 지난해 1억8000만원가량의 수입을 올린 데다 월급의 20% 이내에서 회사가 15% 할인해 지급하는 자사주도 꾸준히 모으고 있다. 그는 우상향하는 TSMC 주가 그래프를 보여주며 “회사가 성장할수록 내 자산도 함께 늘어난다”며 웃었다.
◇TSMC의 ‘초임금격차’TSMC 엔지니어의 급여는 입사 초기부터 또래 직장인을 크게 앞선다. 대만 통계청에 따르면 반도체 기업 초급 엔지니어의 연봉은 100만~200만대만달러(약 4706만~9412만원)에 달하지만 대졸 신입 평균 연봉은 50만~70만대만달러에 불과하다. 성과급을 포함하면 격차는 더 커진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급여 격차는 더 심해져 대만 전체의 소득 격차를 키우는 배경이 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경제학교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6년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의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8.1%에 이르러 하위 50% 소득 비중(11.8%)의 네 배에 달했다. 같은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 격차가 두 배 수준인 것과 대비된다.
이런 현상은 소비와 결혼 시장도 바꾸고 있다. 반도체 엔지니어는 ‘리궁난(理工男)’으로 불리며 결혼 시장에서 인기가 많다. 류쥔훙은 “회사 이름만 보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어 소개팅에서 직장을 일부러 밝히지 않기도 한다”고 말했다.
엔지니어 배우자도 새로운 사회적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엔지니어와 결혼한 여성들은 ‘위안취마마(園區??·과학단지 엄마)’로 불린다. 이들은 고급 소비와 자녀 사교육, 해외 유학을 주도하는 계층으로 인식된다. 대만의 한 학부모는 “이들은 안정적인 고소득과 탄탄한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해 자녀에게 아낌없이 투자한다”고 했다.
리궁난과 위안취마마가 사는 신주는 수도 타이베이보다 더 높은 집값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최근 5년간 88.1% 올라 타이베이 집값 상승률(26.1%)의 세 배에 달했다. 최근 매매된 한 주택의 3.3㎡당 가격은 45만대만달러(약 2100만원)로 대만 평균인 25만대만달러 대비 1.8배 높았다. 신주는 타이베이 도심에서 84㎞ 떨어져 있다. 서울 강남에서 동탄까지 거리(35㎞)의 두 배를 넘는다. ◇의사보다 TSMC 엔지니어
한국처럼 자녀의 의대 진학을 선호하던 대만 부모의 교육관도 바뀌고 있다. 오랜 수련 과정과 의료 소송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의사와 비교해 석사 졸업 후 빠르게 고소득 트랙에 들어갈 수 있는 반도체 엔지니어가 더 나은 진로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대만의 한 학부모는 “대만은 의료 수가가 낮고 종합소득세율이 높아 의사가 돼도 벌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며 “TSMC와 미디어텍 등의 성과급이 크게 늘어 시니어 엔지니어 연봉이 의사 평균 소득을 뛰어넘는 사례가 흔해졌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입시 현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타이베이 최대 입시학원가인 난양제에는 전기·전자·반도체 등 이공계 진학을 상담하는 학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대형 입시학원 루린복습반 관계자는 “예전에는 의대 합격 실적을 가장 많이 홍보했는데, 최근에는 이공계 진학 관련 상담 비중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성공을 경험한 TSMC 직원들은 자녀도 엔지니어로 키운다. 최근 공대 석사 과정을 마친 장즈하오(가명·28)는 “친구들 부모 대부분이 신주과학단지에서 일한다”며 “같은 반 친구 15명은 엔지니어가 됐고 13명은 의사가 됐다”고 했다. 이어 “졸업한 고등학교 6개 반 중 5개 반이 이과였다”며 “신주에서는 이공계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진로”라고 말했다.
타이베이/신주=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